본문 연구

로마서 2:20 — 어리석은 자의 교사, 어린 아이의 선생

바울은 유대인 교사자가 스스로 붙이는 역할들—눈 먼 자의 인도자, 어리석은 자의 교정자, 어린 아이의 선생—을 인용하면서, 그가 율법 안에서 가진 것은 지식과 진리의 형상일 뿐임을 지적한다.

본문

  1. 20.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a corrector of the foolish, a teacher of babes, having in the law the form of knowledge and of the truth;

이 본문의 의미

로마서 2:20절은 율법에 기대는(2:17) 유대인 교사자가 스스로에게 붙이는 일련의 칭호를 이어간다. 눈 먼 자의 인도자, 어둠에 있는 자의 빛(19절)이라 부른 뒤, 거기에 두 칭호를 덧붙인다. '어리석은 자를 교정하는 자(παιδευτὴς ἀφρόνων)'와 '어린 아이의 선생(διδάσκαλος νηπίων)'. '어린 아이'라는 표현이 학습자를 깎아내린다고 볼 수는 없다. 신약其他地方에서 νήπιος는 아직 성숙하지 못한 자, 곧 기초적 입문 단계의 가르침이 필요한 자를 가리킨다.

결정적 수식은 마지막 절에 있다.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형상(μορφώσεως)을 가진 자'. μόρφωσις(μόρφωσις)는 신약에서 여기에만 등장하는 단어로, 본질이 아닌 외형·윤곽을 뜻한다. 바울은 율법에 참된 지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교사자가 가진 것은 그 윤곽, 즉 외적 형태일 뿐이며 살아 있는 능력은 없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율법은 형상을 주고, 하나님을 참 아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순종을 요구한다.

이것이 21–23절의 날카로운 질문들을 세워놓는다. 남을 가르치면서 너는 너 자신을 가르치지 않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preach하면서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하면서 행하느냐, 우상을 미워하면서 성전을 약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면서 그 위반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따라서 20절은 이 단락의 분기점이다. 가르침의 어휘가 드러나는데, 그에 상응하는 실천이 없는 형상만 있을 뿐이므로, 이것이 바로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욕되는 이유(24절)가 된다.

배경

로마서 2:17–24절은 하나의 연속된 설교 덩어리를 이룬다. 바울은 일반적인 도덕 비판으로부터 '유대인의 이름을 가진 자'이며 율법에 기대는 자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17–20절은 스스로 감당한다고 여기는 특권들을 쌓아 올린다—하나님의 뜻을 앎, 아름다운 것을 분별함, 인도자·빛·교정자·스스로 믿는 교사로서의 확신. 20절은 본격적인 반전(21절부터)이 시작되기 전 자기 묘사의 정점에 있다.

이 장 전체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외모로 사람을 보시지 않는다(11절)는 논제를 세운다.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 책임지며, 율법을 듣는 것만으로 의롭게 되지 못하고 행위로 판단받는다(12–13절). 20절까지의 지적은 율법을 '형상'으로만 가진 채 그것대로 행하지 않으면 유대인 교사자가 더욱 책임지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가르치면서 본인이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욕되는 것'(24절)이 된다.

자주 묻는 질문

'지식과 진리의 형상(μορφώσις)'은 무엇을 뜻하는가?

신약에서 단 한 번만 쓰이는 μόρφωσι스는 본질이 아니라 외적인 형태·윤곽을 가리킨다. 바울은 율법에 지식과 진리가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 교사자가 가진 것은 그 외형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율법을 가졌다는 데서 확신을 가지지, 마음으로 순종한다는 데서 갖는 것이 아니다.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는 표현은 비판적인가?

νήπιος는 기초적 가르침이 필요한 자를 뜻하며, 적대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바울의 비판은 교사가 가르치는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의 확신과 율법에 대한 실제 순행 사이의 간극을 향하고 있다.

20절이 21–23절로 어떻게 이어지는가?

20절은 교사자의 칭호들을 나열하며 수사적 반전을 준비한다. 21–23절은 이어서 연속적인 질문을 던진다—너는 자신을 가르치느냐, 아니면 preach하는 것을 본인이 행하느냐. 20절의 자기 묘사가 그 모순을 드러내는 전제가 된다.

연구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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