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질문

고난 속에서도 시인이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는 이유

심한 고통 속에서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은, 고난이 그 인격적 관계를 침묵시키지 못하게 하는 언약적 신실의 행위이다.

답변

'내 하나님, 내 하나님'이라는 반복은 버림받았다는 고백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관계를 필사적으로 붙잡는 행위이다. 시인이 '왜'라고 묻기 전에, 그가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를 먼저 선포한다. 그 인격적 유대가 아프게 엷게 느껴질 때조차, 고난이 그 관계를 끊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신음 가운데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그 비용을 치르기 때문에 믿음의 행위이다. 고통에 흔들리지 않은 믿음이라면 가볍게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시험받는 믿음만이 손을 뻗어 '당신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시며, 저는 여전히 당신의 것입니다'라고 고집한다. 그 부르짖음 자체가 하나님을 붙잡는 형식이 된다.

바로 이 까닭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 말씀을 인용하신다(아래 참고 구절 참조).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이 순간이 실은 가능한 가장 깊은 교제이다. 아들이 죄와 단절의 무게를 견디면서도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라 부르신다. 따라서 시인의 '나의 하나님'은 하나님을 놓지 않고 고난을 견디는 모든 이의 모범이 된다.

배경

시편 22편은 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표시하게 될 말로 시작된다. 다윗은 이 애가를 가벼운 불평이 아니라 악장에게 바치는 구조화된 기도로 지었고, '아얄렛 하스-샤하르'(사슴의 새벽)라는 곡조에 붙였다. 그 제목은 고통 속에서도 새벽과 회복을 암시한다.

이 시편은 이 날것의 부르짖음에서 시작하여 조롱과 육체의 고통, 사회적 고립을 거쳐 마침내 찬양으로 나아간다. '그가 고난받는 자의 괴로움을 �시하지 아니하시며'라는 고백에 이른다. 따라서 1절의 '나의 하나님'은 시편 전체가 끝부분에서 공개적으로 찬양하는 바로 그 하나님과 같은 분이심을 기억하면서 읽혀야 한다.

관련 본문

  • Psalm 22:1 이 동일한 첫 구절이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인용하신 말씀이다. 시인의 버림받음의 부르짖음이 곧 세상의 죄를 담당하실 때 아들이 그 입술에 올리시는 기도가 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자주 묻는 질문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는 하나님이 시인을 정말 떠나셨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않다. 그 질문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라 불리시는 분께 향한다. 느껴지는 버림은 실제 유기(遺棄)와 같지 않다. 시인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관계가 그대로임을 증명한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질 때 어떻게 신자가 '나의 하나님'이라 말할 수 있나요?

감정이 아닌 믿음으로 가능하다. '나의 하나님'이라는 언약적 호칭은 현재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힘 위에 선다. 믿음은 '왜'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나의'를 주장한다.

애통(애가)도 예배의 한 형태입니까?

그렇다. 시편 22편은 악장에게 바쳐졌는데, 이는 다윗이 자신의 고통을 침묵시키지 않고 노래되게 하려는 의도였음을 뜻한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애통하는 것 자체가 예배이다. 그 누구, 그 무엇도 하나님 대신에 예배받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연구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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