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위로

대가들이 물러설 때에도 설 수 있는 용기

유다는 팔백 명의 병력만 남은 채 자기 병력의 스무 배에 달하는 군대에 맞선다 — 고난과 위안의 교훈은 죽음에 이르는 충성 안에 숨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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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베오상 9:1-20

바키데스가 유대로 돌아오다 데메트리오스가 니카노르와 그의 군대가 전투에서 전멸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키데스와 알키무스를 두 번째로 유다의 땅에 파견하였으며 그들과 함께 군대의 우익을 보냈다. 그들은 길갈로 가는 길을 따라 가서 아르벨라의 메살롯을 향해 진을 치고, 그곳을 점령하여 많은 사람을 죽였다. 백오십이 년의 첫째 달에 예루살렘을 향해 진을 치고, 이로부터 떠나 이만 명의 보병과 이천 명의 기병을 데리고 베레아로 갔다. 그때 유다는 엘라사에 진을 치고 있었으며, 그와 함께 천 명의 정선된 병사들이 있었다. 그들이 적군의 엄청난 수를 보고 크게 두려워하여, 진영에서 떠나는 자들이 많아져 겨우 팔백 명만 남게 되었다. 유다는 자신의 군대가 떠났고 전투가 임박한 것을 보고, 그들을 모을 시간이 없었으므로 마음이 깊이 상하였다. 그는 기운이 빠졌으나 남은 자들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적을 향해 올라가자. 우리가 그들과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를 만류하기를,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우리 생명을 구하고, 나중에 우리 형제들과 함께 돌아와 싸우도록 합시다. 우리가 너무 적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유다가 이르되, "그들로부터 도망하는 것과 같은 일은 우리에게 결코 합당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때가 왔다면, 형제들을 위하여 용감히 죽고, 우리의 명예에 의문을 남기지 맙시다." 유다의 마지막 전투 그러자 바키데스의 군대가 진영에서 나와 전투를 벌이려고 진열하였다. 기병은 두 부대로 나뉘었고, 물메를 쏘는 자들과 활 �는 자들은 군대의 앞에 섰으며, 모든 주요 전사들도 그러하였다. 바키데스는 우익에 있었다. 두 부대에 둘러싸인 밀집 대형이 나팔 소리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고, 유다와 함께 있는 자들도 나팔을 불었다. 군대의 소리에 땅이 진동하였으며, 전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맹렬히 계속되었다. 유다가 바키데스와 그의 군대의 세력이 우익에 있는 것을 보고, 모든 용감한 자들이 그와 함께 가서 우익을 격파하였으며, 그가 아소투스 산까지 그들을 추격하였다. 좌익에 있던 자들이 우익이 격파된 것을 보고 돌아서서 유다와 그의 군인들을 뒤따랐다. 전투는 격렬해졌고, 양편에서 많은 사람이 부상당하거나 쓰러졌다. 유다도 쓰러졌고, 나머지는 도망하였다. 그때 요나단과 시몬이 그들의 형제 유다를 거두어 모데인에 있는 그들의 조상의 무덤에 묻고, 그를 위하여 울었다. 온 이스라엘이 그를 위하여 크게 애곡하였고, 여러 날 동안 애통하며 이르되, "이 위대한 자,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어찌하여 쓰러졌는고!" 유다의 나머지 행적과 그의 전쟁들, 그가 행한 용맹한 업적들과 그의 위대함은 기록되지 않았다. 그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요나단이 유다를 계승하다 유다가 죽은 후에, 불법자들이 이스라엘 온 지역에서 나타났고, 모든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 무렵에 매우 큰 기근이 발생하였고, 백성은 그들과 함께 적에게로 떠나갔다. 바키데스는 경건치 않은 자들을 택하여 그들로 그 지방을 다스리게 하였다. 그들이 유다의 친구들을 찾아내고 추적하여 바키데스에게로 끌어내니, 그가 그들에게 보복하고 그들을 조롱하였다. 이것이 이스라엘에 큰 고난이 있었으니, 선지자들이 그들 가운데서 그치는 이래로 없던 그런 고난이었다. 그때 유다의 모든 친구들이 모여 요나단에게 이르되, "당신의 형제 유다가 죽은 후로, 우리의 원수들과 바키데스를 대적하고, 우리 민족 중에서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을 상대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오늘 당신을 택하여 우리의 통치자와 지도자로 그의 자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전투를 하게 하려 합니다." 그때 요나단이 그 지도력을 받아들이고 그의 형제 유다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요나단의 원정 바키데스가 이 일을 알고 그를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요나단과 그의 형제 시몬 및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자들이 이 소식을 듣고, 데koa의 광야로 도망하여 아스발의 못물 곁에 진을 �다. 바키데스가 안식일에 이 사실을 알게 되고, 그가 온 군대와 함께 요단강을 건넜다. 요나단이 그의 형제를 다수의 지도자로 보내고, 자기 친구인 나바테아인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던 많은 군수물품을 그들에게 보관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줄 것을 간청하였다. 메데바 출신의 얌브리 아들들이 나와서 요한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빼앗아 가지고 떠나갔다. 이 일들 후에, 요나단과 그의 형제 시몬에게 소식이 전해졌다. "얌브리 아들들이 큰 혼인 잔치를 베풀고, 나다밧에서 가나안의 귀족 중 한 사람의 딸을 큰 호위대와 함께 신부로 데리고 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들의 형제 요한의 피를 기억하고, 올라가서 산의 은폐 아래에 숨었다. 그들이 눈을 들어 살펴보니, 군수물품을 많이 가진 떠들썩한 행렬이 보였고, 신랑이 그의 친구들과 형제들과 함께 나와서 타악기와 음악가들과 많은 무기를 가지고 그들을 맞았다. 그들이 매복에서 그들에게 돌진하여 죽이기 시작하였다. 많은 사람이 부상당하거나 쓰러졌고,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였다.

마카베오 상권 9:10은 그 붕괴를 기록한다.三千의 정예 병사 중에서, 팔백 명만이 남을 때까지 그 대열이 녹아내린다. 유다는 “영이 압도되었으나”(10절), 후퇴의 권고를 거부한다. 그의 말 — “만약 우리의 때가 왔다면, 우리의 형제들을 위하여 용감하게 죽자”(10절) — 는 절망과 위안 사이의 경�이 된다.

Narration

역사적 배경

니카노르의 패배와 사망 후(1 마카베오서 7장), 데메트리오스는 박키데스를 증원된 군대 — 보병 이만 명과 기병 이천 명 — 와 함께 파견하여 마카베오 반란을 단번에 분쇄한다. 유다는 자신의 군대를 예루살렘 북쪽 엘라사에 배치하지만, 적의 압도적인 병력의 광경은 그의 군대들의 사기를 꺾는다. 정예 병사 삼천 명 중 단 팔백 명만이 남는다. 조우의 지리적 배경은 유대의 구릉지대, 길갈과 아르벨라와 브레아 사이의 지역이다 —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이전에 전투를 벌였던 바로 그곳들. 이 전투가 있기까지, 유다 마카베오는 이미 놀라운 승리의 의외의 도구였다: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아폴로니우스와 세론을 격퇴하며, 니카노르의 첫 번째 침공을 분쇄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처음부터 특징짓던 바로 그 패턴이 여기서 다시 나타난다 — 언약의 백성이 이방 제국들에 대해 수적 멸종에 직면하며, 서느냐 도망치느냐의 문제가 그 시대의 영적 위기가 된다. 신학적으로, 이 에피소드는 더 넓은 정경적 '남은 자'의 이야기 — 압도적인 고난을 통한 신실한 소수의 보존 — 안에 위치한다. 이 시대는 후기 제2성전기에 속하며, 유대 정체성이 피를 통해 단련되던 구약과 신약 사이의 수십 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 맥락은 내부로부터의 응답을 요구하는 민족적 고난의 하나이다: 의로운 자들이 패배하는 것처럼 보일 때, 어디에서 위안을 찾는가?

엘라사에서 온 땅

첫 성전 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예루살렘의 다윗의 핵심 지역과 세겜과 헤브론의 산악 지역에 걸쳐 이스라엘이 압박을 견뎌내고 언약의 소망을 붙들었던 곳을 다룬다.

본문의 의미

이 본문은 충격적인 정보로 시작합니다. "진영에서 많은 사람이 도주하여, 겨우 팔백 명쯤 남았을 때에야 멈추었다"(마카베오 1권 9:6). 여기서의 고난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연대가 천천히 증발해가는 것이며, 충성심이 얼마나 얇은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유다는 "심히 낙심하였고"(10절), 본문은 그의 낙심이 진짜임을 우리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합니다. 그는 흩어진 군대를 소집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때가 되자 선택을迫らざる를えません. 그의 동료들은 생존을 권고합니다. "차라리 지금 우리 생명을 구하고, 나중에 우리 형제들과 함께 돌아와 그들과 싸웁시다. 우리가 너무 적으니"(9절). 이것은 신중함의 목소리, 자기 보존의 목소리입니다. 유다는 이방 규헌 문헌 가운데서도 가장 인상적인 문장 중 하나로 이에 답합니다. "그들 앞에서 도망치는那样的 일을 우리가 행함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때가 왔다면, 형제들을 위해 담대히 죽고, 우리의 명예를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맙시다"(10절). 여기서 두 신학적 흐름이 함께 흐릅니다. 첫째, 고난이 재해석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패배가 아니라 증언이 됩니다. 형제들을 위해 담대히 죽는다는 것은 자신의 피로써 간증을 써 내려가는 것입니다. 둘째, 위안이 재배치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고통의 부재가 아니라 명예의 현존입니다. 유다에게 승리가 약속되지 않습니다 — 실제로 다음 절들은 그의 죽음을 서술합니다 — 그러나 그의 이름이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 약속됩니다. 그가 추구하는 위안은 전투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정당성을 받는 것입니다.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 독자들은 이 본문을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는 것이다"(요한복음 15:13)라고 한 더 큰 유다(사도)의 예표로 읽어 왔습니다. 마카베오 2권 6-7장의 마카베오 순교자들은 이 주제를 부활의 교리로 확장시킵니다. 언약을 위해 죽는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일으켜집니다. 그러므로 위안은 고난의 역전이 아니라 그 변용입니다. 엘라사에서 "심히 낙심한" 사람은, 도망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장수가 쓰러져도 멸하지 않을 한 백성의 씨앗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 삶으로 실천하기

현대 신자에게 요구하는 세 가지 구체적인 움직임: 1) 버림받은 사실을 솔직히 말하라. 고난 속에서 위로를 찾기 전에, 우리 주변의 대열이 어디에서 얇아졌는지 인정해야 한다. 유다는 자신의 군대가 충만하다고 가장하지 않는다. 신실함의 첫걸음은 “내 영이 꺾였다”고 말할 용기이다. 많은 신자들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는 것이 신실하지 못하다고 두려워하여, 말하지 못한 패배 속에서 살아간다. 사실은 정반대이다. 유다는 자신의 꺾임을 인정한 다음 행동한다. 2) 신중함과 명예를 구분하라. 후퇴하여 지원군을集结하고, 다음 날을 위해 싸움을 이어갈 생명을 보존할 때가 있다. 마카베아 본문은 신중함 자체를 비난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의 명예에 어떤 의문도 제기할 이유가 없는” 도주를 비난할 뿐이다. 모든 시험에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 고통스러운가?”가 아니라 “내가 후퇴하면 나의 부름에 부끄럽지 않은가?”이다. 답이 아니요라면, 후퇴는 신실함이다. 답이 그렇다면, 서라. 3) 위로의 의미를 다시 정돈하라.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통의 제거라는 편안함을 추구한다. 그러나 유다는 더 깊은 위로를 가리킨다. 곧, God 앞에서 흠 없는 이름을 지키는 위로이다. 우리가 치유를 얻을 수 없을 때, 거룩함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승리를 얻을 수 없을 때, 증거를 세울 수 있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올 수 없을 때, 신실하게 죽을 수 있다. 이것은 스토아주의가 아니다. 이것은 Paul이后来 펼쳐 밝힌 십자가의 논리이다. “우리의 잠깐 동안의 가벼운 고난이 우리에게 영원한 영광의 중량을 준비하고 있다”(고린도후서 4:17). 이 본문에서 고난과 위로는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도주하기를 거부하는 사람 안에서 만나는 동반자이다.

되새김

이 본문이 내게 던지는 가장 깊은 질문은 이렇다: 엘라사에서 나는 무엇을 했을 것인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피했을 것인가, 삶을 보존하여 후일을 도모했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이길 것이라고 믿어서가 아니라, 목격의 증언이 결과보다 더 중요하다고 믿어서, 800명과 함께 섰을 것인가? 나는 이 본문이 도망친 자들을 정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을 기록할 뿐이다. 어쩌면 이것이 은혜일 것이다 — 어쩌면 그들 중 다수가 후에 돌아왔을 수도 있다. 마치 유다 자신이 이전 날에 한 번 도망친 적이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본문은 우리 눈을 한 사람에게로 고정시킨다. 그는 짓눌린 그 시간에 기이한 위안을 발견했다. 그 위안은 두려움의 부재가 아니었다. 유다는 '짓눌렸다.' 승리의 확실성도 아니었다. 그는 해질녘에 죽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것들이 — 명예, 우애, 자신이 남기는 이름이 — 생존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확실함이었다. 이것은 실망하지 않는 위안이다. 이것은 행복한 결말을 약속하지 않는다. 이것은 부끄럽지 않을 결말을 약속한다. 결말이 종종 우리에게 강요되는 세상에서, 이것이 고통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일 수 있다.

자주 묻는 질문

유다가 정말로 800명의 병력만 가지고 있었습니까?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탈주했습니까?

예 — 본문은 분명히 세 천 명의 정예된 병사 중 겨우 팔백 명만이 남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압도적인 격차 때문이었습니다. 이만 명의 보병과 이천 명의 기병, 대략 이십오 대 일의 비율이었습니다. 고대 전쟁에서 이러한 비율은 사기를 무너뜨렸고, 병사들은 승산이 없다는 것을 보면 도망쳤습니다. 유다 자신도 자신의 영이 꺾였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패가 신적 목적을 취소하지는 못합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정결하게 되어 있었고, 메시아적 약속은 이 남은 자들에게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유다가 물러나기를 거부함으로써 죄를 지었는가?

자존심이 아니라 신의, 즉 충성심이다. 자존심은 자기 영광을 추구하지만, 유다는 그의 형제들을 위한 증인이 되기를 구한다 ― "우리 때가 왔다면, 용감하게 죽자." 이것은 예수님의 원리, 즉 가장 큰 사랑은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이라는 원리와 일치한다(요한복음 15:13). 물론, 다른 날을 위해 힘을 보존하는 것도 또한 현명한 군사적 선택이다; 그러나 유다는 현재의 희생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행위로 다루기로 선택한다 ― 이것은 히브리서 11장의 바로 그 논리이다. 거기서 영웅들은 "더 나은 부활을 얻기 위해 석방을 받기를 거부하였다."

고통과 위안이 어떻게 함께 존재할 수 있는가?

성경에서 고난과 위로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존재하는 realities입니다. 유다는 자신의 영이 산산이 무너지는 바로 그 순간에 위로를 찾습니다. 그것은 고통을 제거하는 위로가 아니라, 흠 없는 이름을 보존하는 위로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4절은 “우리가 모든 환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시려고”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신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고난은 우리를 위로로 인도하고, 위로는 우리가 고난을 감당할 수 있게 합니다. 그들은 모순이 아니라 하나의 은혜를 이루는 두 측면입니다.

신약성경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가?

신약성경은 마카비기를 직접 인용한 적이 없지만, 히브리서 11장은 분명한 울림이다 — "고문을 받으면서도 풀려나기를 거절한" 자들. 요한복음 15:13("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리라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은 유다의 결정을 떠올리게 한다. 요한계시록의 순교자들은 같은 계열에 서 있다 — 어린 양의 피로 승리하면서도 죽임을 당한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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