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과 부르심

어둠 속에서 봄: 욥기 23장과 부르심의 확실성

방향이 사라지고 길이 가려질 때, 우리의 부르심이 무효가 되지 아니하니 — 하나님은 우리가 밟는 길을 아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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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ESV
욥기 23:1-17

요이브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도 내 원망을 분하게 말하리이다 내 신음이 중하여 나의 힘이 쇠하였도다 이 어찌 나를 알지 하나님께 나아가 하늘 궁창 자리에 이를 줄 알면 내가 내 사건을 베풀고 입으로 변론을 채우리 나를 향한 그 대답이 무엇인지 내가 알며 내게 응하시는 말이 무슨 것을 내가 알리이다 하나님이 큰 권세로 나를 다투시리라 과연 나를 죄로 정하지 아니하시리라 거기서는 의인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라 내가 나를 판단하시는 자 앞에서 영영히 벗어나리라 그러나 내가 동으로 가면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아니하시고 서로 가도 내가 그를 뵈지 못하며 북으로 가도 능히 보지 못하며 남으로 가도 여전히 감취었으므로 하나님이 나의 가는 길을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실지라도 내가 금 같이 나오리라 내가 그의 발자국을 따랐으며 그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으며 그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내 일용 양식보다 더 귀히 여기였도다 이 정함이 변하기 어려우니 하나님이 뜻하시는 것은 이루리라 그런즉 나를 위하여 이 일을 이루시리니 그러나 오히려 그와 같은 자가 많도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앞에서 무서워하며 생각하면 그 앞에서 떨게 되는도다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 하시며 전능자가 나로 놀라게 하시도다 어둠이 나로 끊지 못하였으며 나를 가리운 흑암이 스스로 덮이지 아니하였도다

욥기 23장은 지리나 논변으로도 하나님을 찾아낼 수 없는 의로운 고난자의 통곡이면서, 동시에 전능자가 그의 길을 아시며—언젠가—그를 금과 같이 시험해 내실 것을 고백하는 장입니다. 이 장은 두 가지 긴장을 하나로 묶어 줍니다. 곧,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 부재와 하나님의 임재와 목적을 신학적으로 확신하는 긴장입니다.

Narration

우스의 폐허와 고통받는 성도

욥기는 우스 땅에서 배경이 펼쳐지는데, 전통적으로 아라비아 사막의 건조한 동쪽 가장자리, 에돔과 유프라테스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 이 배경은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의 것이 아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욥 1:1)임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이스라엘인이 아니다. 그는 열방 가운데 거하며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이며, 그의 고난은 자신의 부르심이 환경에 의해 모순될 것처럼 보일 때 그가 온전함을 지킬 것인가에 대한 우주적 시험으로 우리 앞에 제시된다. 23장은 욥의 두 번째 큰 독백 순환(21-25장) 가운데 속한다. 이 시점에 이르러 욥은 그의 자녀들, 그의 부, 그의 건강, 그리고 '동방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자'(욥 1:3)였을 때 누리던 사회적 지위까지 잃었다. 그의 세 친구들은 위로를 책망으로 바꾸었고, 네 번째 음성인 엘리후가 가세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 장은 포위당한 부르심의 독백이다. 한때 하나님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정확히 알았던 사람이 이제 그 길 자체가 사막으로 녹아버린 것을 발견한다. 이 장의 공간적 은유들—동, 서, 북, 남—은 하나님이 모든 방향에서 이스라엘을 축복하시기를 구하는 민수기 6:24-26의 제사장적 축복을 반향한다. 여기서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은 모든 방향에서 부재하십니다. 그럼에도 욥이 네 방위를 살피는 바로 그 사실은 그가 여전히 하나님의 조건 위에서 지리학을 그리고 있음을 증명한다. 세계는 여전히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단지 숨기신 분만 찾을 수 없을 뿐이다. 이것이 이 장의 중심 주장인 '그는 나의 가는 길을 아신다'(욥 23:10)를 위한 무대를 세운다. 교부들을 따르는 전통적인 기독교적 해석은 욥을 정당한 고난자의 전형(type)으로, 그의 장을 자신의 소명에 대한 감각이 어두워진 모든 신자의 학교로 본다. 자신의 부르심이 하늘에 의해 잊혀졌다고 느끼는 것보다 더 부식적인 현대 시대 특유의 유혹은 없다. 욥기 23장은 그 어둠 속으로 고집스럽게, 거의 도전적으로, faith(신앙)을 가지고 말한다. 길은 보이지 않을지라도 인도자는 부재하지 아니하신다.

시공간: 바늘 없는 나침반

족장 시대의 우스 땅을 배경으로 하며, 고대의 고난, 소명,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지혜 전통 속에서 욥의 초기 장들이 펼쳐진다.

의미: 그가 발견될 수 없는 곳에서 발견됨

의미 #1 — 부르심은 지도의 상실로 무너지지 않는다. 욥의 사방 탐색(8–9절)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다. 단일한 중심에서 네 강이 흘러나왔던 에덴 동산을 떠올려 보라(창 2:10–14). 중심을 잃는 것은 나침반을 잃는 것이다. 욥은 자신의 중심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중심이 자신에게 행사하는 청구권을 잃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재판정 앞에 자신의 사건을 펼치고자 한다(4절). 그의 불평의 문법 자체가 그의 소명—의로운 증인이 되는 것—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심지어 재판관이 법정을 닫아버린 때에도. 명확성의 정지가 정체성의 정지는 아니라는 것은 자신의 소명이 정지된 듯 느끼는 모든 이를 위한 첫 번째 목회적 말씀이다. 학도는 스승이 들을 수 없는 거리에 있을 때에도 여전히 학도이다. 의미 #2 — 신적 지식은 모든时节 앞선다 그리고 그것을 초월한다. 그러나 '그분이 나의 가는 길을 아신다'(10절)는 이 장의 경첩이다. 히브리어는 친밀하다. '길'이라는 뜻의 '데렉'(derek)는 시편 1:6에서 의인의 길을, 시편 25:4에서는 주의 길을 가리키는 바로 그 단어다. 욥은 하나님이 그의 길을 승인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길을 추적하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알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동사 '야다'(yada)는 단순한 정보가 아닌 언약적 지식이다. 이 히브리어 의미 안에서 하나님께 '알려짐'은 어떤 것도 중단시킬 수 없는 관계적 관심의 대상이 됨을 뜻한다. 따라서 욥의 고백은 낙관론이 아니라 존재론이다. 아시는 하나님은 곧 '금으로 나올'(10절) 하나님이시다. 정련의 불은 유기(遺棄)의 증거가 아니다. 그것은 감정(鑑別)의 증거이다. 의미 #3 — 은폐는 은폐와 같지 않다. '그러나 내가 어둠에 끊어지지 아니하였고 나를 가리운 흑암이 내 앞에서 물러가게 하였도다'(17절). '가리운'이라는 히브리어 동사 '카사흐'(kasah)는 시편 139:15 '땅 깊은 곳에서 짜매이며'와 이사야 49:2 '그의 손 그늘에 나를 숨기셨도다'에 사용된 바로 그 동사다. 욥이 명명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나중에 신적 보호에 기초한 신적 은폐라고 부를 것이다. 어둠은 덮을 뿐 소멸시키지 않는다. 최종 서곡 — 10절은 선율과 교리가 만나는 곳이다. '그의 입의 말씀을 나의 일용할 양식보다 더 귀히 여겼도다'(12절). 하나님의 말씀 없는 부르심은 나침반 없는 길이며 맛 없는 식사다. 욥이 계시 양식을 양식보다 더 귀히 여겼다고 고백한 것은 어떤 지속적 소명을 위한 윤리적 기초이다. 부름받은 자는 세상을 먹기 전에 말씀을 먹는 자다. 이 기초로부터 두 가지 신학적 함의가 도출된다. 첫째, 신적 시험은 징벌적이지 않고 교육적이다. 감정관은 불이 붙기 전에 그 목표(정제된 금)를 알고 계신다. 둘째, '또한 이런 자가 많아 예비되어 있도다'(14절)는 것은 많은 해석자들에게 부활 집회의 그림자—많은 시대를 위한 많은 증인, 모두 하나님이 정하신 끝까지 '예비되어'—를 암시한다. 우리가 14절을 공동체적 또는 종말론적 암시로 받아들이든, 목회적 요점은 한 고통받는 자의 시험이 고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풀무가 많은 이를 위해 준비되었고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소멸되지 않았다.

적용: 지도가 사라졌을 때 부름을 붙드는 법

1. '욥기 23 일기'를 작성하라.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을 때, 그분에 대해 여전히 믿고 있는 것을 써라. 욥이 그렇게 했다. 그는 지리적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지만 신학적으로 그분을 찾아냈다. '그분이 내가 가는 길을 아신다.' 당신의 일기 항목은 감정의 기록이 아니라 믿음의 기록이다. 2. '잃어버린 방향'과 '잃어버린 소명'을 구별하라. 욥은 자신의 방향 감각(8–9절)은 잃었지만 그의 소명(10절)은 잃지 않았다. 다음 걸음을 볼 수 없을 때, 다음 십 년을 잃었다고 가정하지 말라. 당신의 길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은 당신의 인식에 달려 있지 않다. 3. 당신의 소명에 관한 어휘를 지키라. 욥의 원망은 위험했다('쓰디쓰다', 2절), 그러나 그의 고백은 흔들리지 않았다('그분의 입의 말씀을 나의 매일의 양식보다 더 귀히 여겼나이다', 12절). 아침에 쓴소리를 하고 정오에 축복을 말하는 혀는 그 소명을 살아 있게 하는 혀이다. 당신의 소명에 모순되는 단어들과 전쟁하라; 그것을 확증하는 단어들을 가꾸라. 4. 답이 아닌 검정을 기대하라. 10절은 즉각적인 변호를 약속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당신을 '시험하시면' 금으로 나올 것을 약속한다. 어린아이의 조급함이 아닌 정련자의 인내로 당신의 직업을 붙잡아라. 5. 당신의 '네 방향'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거부하라. 동, 서, 북, 남이 모두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약속하는 날들이 있다. 그것들을 이름 붙이라. 그것들을 적어라. 그리고 각각에 욥기 23:10을 기도하라. '주여, 주께서 내가 가는 길을 아시나이다; 그것이 금으로 나타나게 하옵소서.' 6. '어둠 = 포기당함' 논리를 저항하라. 이 장은 사라짐이 아닌 숨겨짐으로 끝난다(17절). 짙은 어둠이 내릴 때, 그것은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리는 것임을 기억하라. 깊음의 수면 위를 성령이 날아다니셨듯이, 그분은 여전히 당신의 어둠의 수면 위를 날아다니고 계신다. 7. ' 예비되어 보존된 자' 중 한 명으로 살아라. 욥기 23:14는 같은 시련의 시간에 맞춰 시험이 예정된 다른 많은 성도들이 있음을 암시한다. 당신은 풀무 속에 혼자가 아니다; 당신은 시련 받는 자들의 합창의 일원이다. 당신의 인내는 아직 줄에 서 있는 다른 모든 이를 위한 간증이 된다.

묵상: 숨겨진 것이지 무효화된 것이 아니다

주여, 당신은 내가 그 길을 찾지 못할 때에도 내가 가는 길을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제가 종종 방향의 상실을 운명의 상실로 혼동했음을 고백합니다. 제가 당신의 임재를 헤아릴 수 없었기에 당신을 부재한다고 이름 붙인 날들을 용서하옵소서. 제가 이제 당신 앞에 가져오는 것은 욥기 23장처럼 느껴지는 제 삶의 페이지들입니다—사방을 더듬거렸으나 찾지 못한 것, 텅 빈 보좌의 방, 위안이 되는 칼이 되었던 벗들의 말들입니다. 당신이 욥을 시험하셔서 금으로 나타나게 하셨던 것처럼, 저도 이처럼 시험하옵소서. 불이 그것을点燃하는 사랑보다 뜨겁지 않도록 하옵소서. 드러나게 될 날까지 어둠이 저를 감추게 하시고, 당신 입의 말씀이 저에게 숨결보다 더 확실하게 여겨지게 하옵소서. 저는 끊어진 것이 아닙니다. 저는 보류되어 있는 것입니다. 짙은 어둠 가운데를 걸어가사 부활절 아침에 나오신 분의 이름으로, 아멘.

자주 묻는 질문

만일 내가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한다면, 나의 소명이 여전히 유효한 줄을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욥기 23:10은 선언합니다. "그가 나의 가는 길을 아느니라." 당신의 부르심의 유효성은 지도 위에 보이는 길의 가시성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계속 추적하고 계시는지로 측정됩니다. 방향 상실은 영적 고통(눈의 실명)이지, 정체성의 종결(손의 상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신다면, 그것은 내가 거부당했다는 뜻입니까?

욥기 23:17은 어둠이 욥을 끊어내지 않았으며, 짙은 황홀이 그를 '덮었다'(kasah)고 말합니다. 히브리어 동사 카사(kasah)는 시편 139:15('땅의 깊은 곳에서 기워 짜이게 하셨나이다')와 이사야 49:2('그의 손 그늘 속에 나를 숨기셨다')에서 사용된 바로 그 동사입니다. 여기서 '덮음'은 징벌적인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은 신의 징벌이었는가, 신의 시험이었는가?

하늘의 서론( 욥기 1–2장 )은 그 고난을 신이 허락하신 시험(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닌 )으로 제시한다. 욥기 23:10의 금으로 단련받는 비유는 베드로전서 1:6–7에 대응되는데,那里에서 그 언어는 징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련을 뜻한다.

옵 23:14의 '이러한 일들'(many such things)은 하나님이 욥에게 계획하신 고난과 시련들이 단 한두 가지가 아니라 셀 수 없이 많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하에 욥이 겪게 될 다양한 시험과 역경들이 준비되어 있음을 강조하며,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해석자들은 이것을 (a) 욥을 위해 예비된 더 많은 시험들, (b)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욥과 같은 더 많은 사람들, 혹은 (c) 시험받은 성도의 집회에 대한 희미한 종말론적 암시로 다양하게 읽어 왔다. pastoral 문법은 동일하다: 어떤 성도의 시험도 고립되어 있지 않다; 풀무는 독주가 아니라 합창을 위해 준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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