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신뢰

믿음의 빛이 어두운 밤을 가로지를 때

시편 88편 — 가장 깊은 구렁텅이에서 여전히 부르짖는 자가 곧 신앙 그 자체이다.

BibleVibe Editorial읽기 5분
번역본:ESV
시편 88:1-19

노래. 고라 자손의 시. 지휘자를 따라 마할랏 르안노스(히브리어 뜻 불확실)에 맞추어. 에스라 사람 헤만의 마스길이여. 여호와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밤에 주 앞에서 부르짖을 때에 나의 기도가 주께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나는 재앙으로 가득 찼사오니, 내가 스올의 가장자리에 이르렀사오니, 내가 함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계수되기를, 힘 없는 자 같이 죽은 자 중에 버린 바 되었사오니, 무덤에 누운 시체 같사오니, 주께서 다시 생각하지 아니하시며, 주의 돌보심에서 끊기신 자들이니이다. 주께서 나를 구의 바닥에 두셨으며, 어두운 데, 깊은 곳에 두셨사오니. 주의 분노가 나를 무겁게 덮었으며, 주의 모든 파도가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나의 동료들로 나를 멀리하게 하시며, 나를 그들의 가증한 자가 되게 하셨사오니, 내가 갇혀 나가지 못하겠나이다. 나의 눈은 환난으로 하여 쇠잔하오니, 내가 날마다 여호와여 주께 부르짖으며, 내 손을 주께 펼치나이다. 주께서 죽은 자를 위하여 기이한 일을 행하시겠사옵니까, 음령이 일어나 주를 찬양하겠사옵니까. 셀라. 주의 신실한 돌보심이 무덤에서 선포되겠사옵니까, 주의 변하지 않음이 멸망의 땅에서 선포되겠사옵니까. 주의 기이한 일들이 음부에서 알리워지겠사옵니까, 주의 은혜로운 행하심이 잊음의 땅에서 알리워지겠사옵니까. 그러나 나 여호와여 주께 부르짖겠사오니, 아침마다 나의 기도가 주를 만납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주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내가 젊어서부터 고난을 당하였고, 죽음에 가까웠사오니, 내가 어디로 돌이키든지 주의 놀라움이 나를 괴롭게 하였나이다. 주의 분노가 나를 삼키며, 주의 놀라움이 나를 멸하게 하였사오니, 그것들이 종일 물같이 나를 두르고, 사방에서 나를 에워싸았나이다. 주께서 내 이웃과 친구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나의 동료들이 내 보지 못할 곳이 되게 하셨나이다.

시편 88편은 시편집에서 희망의 말 없이 끝나는 유일한 시편이지만, 거칠고 끊임없는 기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고라의 후예인 노래자 헤만 에스라핫이 음부의 깊은 곳에서 자신의 영혼을 쏟아냅니다. 이 시편은 믿음이 밝게 느껴진다고 가장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전혀 느낄 수 없을 때 믿음이 무엇을 하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Narration

역사적 배경과 문학적 배경

시편 88편은 고라의 후손 중 레위인 음악가 헤만에게归属된다(역대하 5:12; 역대상 25:1–5). 제목에 붙은 '마스길'이라는 표시는 이 시편이 가르침의 시편임을 나타내며, 그 의미가 불분명한 음악 지시어 '마할랏르안놋'은 고난을 위한 악곡으로 추정되어 시편의 정서와 부합한다. 이 시편의 장르에 이른 뮤의 소위 '애통시편'에 해당하며, 이는 고대 이스라엘의 성전 예배에서 형성된 것으로, 공동체의 찬양이 종종 개인의 고통에 목소리를 부여하였다. 고라 계열의 음악 가문은 회막 앞에서, 그리고 나아가 예리살렛의 첫솔제 열라엠 예배에 복무하였으므로, 이 기도는 포로기 이전 이스라엘의 음악 생활에 속한다. 시편의 시편 73–89편)의 배치는 포로기 및 포로기 이후 시기의 고민스러운 신학적 의문, 곧 의인이 어찌하여 고난받으며, 백성이 압제당할 때에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히브리어: ḥesed)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문제에 연결된다. 헤만은 스스로 '음부(שְׁאוֹל)의 벼랑에 선 자'로 말하며, 하나님의 '진노'(히브리어: 'af)와 '두려움들'(히브리어: ballaḥot)이라는 언약을 말하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시내 산 시소현(Theophany) 언약을 말하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시내 산 언약을 말하는 표현에서 비롯된 것이다(출애 19–20; 신명기 32). 그의 호소는 무신앙이 아니라, 한계점에 이르게 된 언약 신앙이며, 날마다 부르짖음 그 자체가 신뢰의 씨앗이다.

시공간 캔버스

이스라엘 통일왕국의 다윗 시대, 예루살렘 중심의 첫 성전 시기를 배경으로, 언약의 고난 속에서 신앙이 단련되던 그 시기에 뿌리를 둔 묵상.

신앙이 나락에서 의미하는 것

시편 88편의 가장 깊은 의미는 믿음(히브리어: 에무나, אמונה)과 신뢰(히브리어: 브타흐, בטח)가 하나님의 felt된 임재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으로 정의된다는 것이다. 시편이 황폐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성품을 위해 사용하는 어휘를 주목하라: '나의 구원의 하나님'(1절), '주의 인자한 돌봄'(히브리어: 헤세드, חסד, 11절), '주의 변함 없으심'(히브리어: 에멧/에무나, אמת/אמונה, 11절), '주의 기이한 일들'(10절), '주의 은혜로운 행위들'(12절). 이것들은 언약의 이름들과 언약의 속성들 — 곧 믿음의 내용 그 자체이다. 헤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관한 어휘를 버리지 않는다; 그는 그 어휘를 질문 안에서 다시 주장한다. 그의 반복되는 '죽은 자들을 위해 당신이 기이한 일을 행하시겠습니까?'는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기이한 일들이 스올에 가두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간청이다. 이 시편에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포하신 그분의 성품을 그분의 침묵의 법정으로 가져오는 고집스러운 행위이다. '확고하고 확실하며 신실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뿌리 '므-ㄴ(אמן)'은 시편 자신이 도무지 확고하지 않다고 느낄 때 바로 그때에 가장 깊은 일을 하고 있다. 나아가, 이 시편은 고통이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마지막 말이 되지 않음을 거부함으로써 심판과 망령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것을 모범화한다 — 그것은 바로 우리 신학 용어들이 명명하는 범주들이다. 스올이 망각의 땅일지라도, 헤만의 새벽 기도는 어쨌든 하나님의 '얼굴'(히브리어: 파님, פנים) 앞에 계속 도달하여, 신학이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그곳에서 관계를 주장한다.

오늘날 믿음을 실천하기

우리가 자신의 '구덩이'에 빠질 때 — 슬픔이 예고 없이 찾아올 때, 병이 재발할 때, 친구들이 멀어질 때, 밤마다 전하는 뉴스로 세상이 자기 구덩이의 바닥에 있음을 확인할 때 — 이 시편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까? 시편 88편은 신뢰의 네 가지 구체적인 실천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첫째, 감정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라: "내 기도가 아침마다 주를 맞이하리이다"(13절). 양보할 수 없는 한 시간 — 단 5분이라도 — 을 정하고, 마음이 따라잡기 전에 입이 먼저 그 말들을 형성하게 하라. 둘째, 하나님의 언약적 이름을 입에 담고 살아라: "영원하신 이," "나의 구원의 하나님," "신실한 돌보심," "변함없음." 감정이 거짓말할 때, 어휘는 영혼을 훈련시킨다. 셋째, 최악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라. 상처가 되기도 전에 고난을 "교훈"으로 영적으로 포장하지 말라. 헤만은 격노와 공포, 소용돌이치는 물결을 말한다 — 그것들을 그대로 이름 붙이라. 하나님 앞에서 어둠을 숨기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공연이다. 넷째,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헤만이 될 수 있을 만큼 공동체 안에 오래 머물라. 그는 "친구와 이웃"이 "나에게서 멀다"(18절)라고 통탄한다. 만약 당신이 그 친구라면, 머물라. 만약 당신이 고난받는 자라면, 누군가가 머물도록 허락하라. 믿음은 갑작스러운 구원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는 함께 있음의 순종 안에서 형성된다. 마지막으로, 심판과 망명의 신학을 기억하라: 때로 구덩이는 결과이며, 고백이 신뢰의 일부이다. 헤만은 특정한 죄를 지목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손이 무겁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도 않는다. 긍휼과 진리 둘 다를 당신의 기도에 가져오라(시편 25:10).

되새김

네가 오늘 아침에 깨어났을 때 첫 번째로 느낀 것이 헤만의 말 — '나는 갇혀서 나가지 못하리라' — 였다면, 이 시편은 오늘 너의 시편이다. 쓴 진실에서 마음을 끌어내라: 너는 여전히 기도하고 있다. 그 말들이 올라왔고, 네가 성경을 펼쳤고, 88장으로 스크롤했고, '내 기도가 주께 이르게 하소서'라고 읽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 그것이 믿음이 자기의 가장 보이지 않는, 가장 힘 있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스올의 부재가 아니다; 믿음은 여전히 하나님의 앞으로 걸어 들어가 '나는 아직 여기 있고, 주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하는 아침의 음성이다. 그 음성을 가지고 하루를 살아라. 오늘 밤, 별이 떠오를 때, 다시 한 번 기도하라 — 한 문장이라도, 분노한 한 마디라도, 혼란스러운 한 마디라도. 신뢰는 두 기도 사이의 솔기에서 쌓인다: 네가 오늘 아침에 드린 기도와 오늘 밤에 드릴 기도 사이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신실한 돌봄(חסד, 헤세드) 안에서 그 두 기도 모두를 세고 계신다.

자주 묻는 질문

시편 88편이 절망으로 끝난다면, 어떻게 그것이 믿음을 가르칠 수 있는가?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한 사람의 부르짖음의 방향이다. 헤만은 말을 멈추지 않는다 — 그는 매일 아침 하나님 앞에 나아온다. 믿음의 가장 깊은 정의는 이것이다. 하나님이 부재한다고 느껴질 때조차, 기도는 여전히 그의 임재에 도달한다. 시편 88편은 함정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함정을 인정하면서 —それでも 여전히 부른다. 그것 자체가 믿음의 형상이다.

스올이 정말로 사람을 하나님의 돌보심에서 끊어놓는가?

구약의 이해에서 스올은 하나님의 기억이 미치지 않는 곳입니다(시편 88:5). 헤만은 이 신념을 자신의 기도 논거로 사용합니다. "죽은 자들이 주를 찬양할 수 없사오니." 이 부르짖음이 성경 전체의 흐름을 이끌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죽음의 영역에 들어가시고 부활에서 헤만의 질문에 답하십니다. 그 답이 오기 전에 하나님의 신실한 돌봄이 무덤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하나님께 솔직하게 분노와 혼란을 표현해도 됩니까?

시편 88편 전체가 그 답입니다. 헤만은 하나님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묻고, 하나님의 분노로 자신이 짓눌리고 있다고 시사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솔직함을 결코 불신앙으로 다루지 않습니다 — 오히려 시편들은 그것을 예배로 정전화합니다. 신약성경이 이를 확인합니다 — 십자가 위에서 예수조차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인용하셨습니다.信仰은 공손한 침묵이 아닙니다. 信仰은 상처 입은 채 하나님 앞에 서서 여전히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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