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과 부르심

혼돈 속에서: 부르심의 첫 빛

창세기 1장은 부르심이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아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혼돈 가운데 말씀하심에서 시작됨을 계시합니다.

BibleVibe Editorial읽기 5분
번역본:ESV
창세기 1:1-20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시작하실 때에— 땅은 형상이 없고 비어 있었고, 어둠이 깊음의 수면 위에 있었으며, 하나님의 영이 물 위를 운행하고 있었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더라. 하나님이 빛이 좋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셨더라.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으니, 첫째 날이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라" 하시더라.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더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으니, 둘째 날이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 아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게 하여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하라" 하시니 그대로 되더라. 하나님이 마른 땅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셨더라. 하나님이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을, 씨 맺는 식물과 각기 씨를 따라 열매 맺는 온갖의 과일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더라. 땅이 풀을, 곧 각기 씨를 따라 맺히는 온갖의 씨 맺는 식물과, 각기 씨를 따라 열매 맺는 온갖의 과일나무를 내었더라. 하나님이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으니, 셋째 날이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이 시기가 되며— 날과 해의 표가 되며, 하늘의 궁창에서 땅을 비추는 광명이 되게 하라" 하시니 그대로 되더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시니, 큰 광명으로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다스리게 하시며, 별들도 만드셨더라.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사 땅을 비추게 하시며, 낮과 밤을 다스리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셨더라. 하나님이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으니, 넷째 날이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의 떼를 무수히 쏟아내며, 하늘 궁창 위에서 땅 위로 날아다니는 새들도 생기게 하라" 하시더라. 하나님이 큰 바다 짐승들과, 물이 떼를 따라 쏟아낸 온갖 기어다니는 생물들과, 온갖 날개 있는 새들을 창조하셨더라. 하나님이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축복하시며 이르시기를, "생육하고 번식하여 바다의 물에 가득하게 하라, 새들도 땅에서 번식하라"고 하셨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으니, 다섯째 날이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각기 생물을 내되— 가축과 기는 것들과 땅의 각기 들짐승을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더라. 하나님이 각기 들짐승과 각기 가축과 땅의 온갖 기어다니는 것들을 만드셨더라. 하나님이 보시니 그것이 좋았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들이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들과, 가축과, 온 땅과, 땅 위에 기어다니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더라. 하나님이 신적인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으니—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더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생육하고 번식하여 땅에 가득하게 하고 그것을 정복하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 위에 기어다니는 모든 살아 있는 것을 다스리라"고 하셨더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온 땅 위에 있는 모든 씨 맺는 식물과 씨 맺는 열매가 있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그것들이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땅의 모든 짐승에게, 하늘의 모든 새에게, 그리고 땅 위에 기어다니는 생명의 기운이 있는 모든 것에, 내가 모든 푸른 식물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더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었으니, 여섯째 날이더라.

창세기 1:1–20 (ESV). 본문은 네 가지의 창조적 날들을 다루고 있다: 빛, 하늘, 땅과 식물, 그리고 해, 달, 별들이다. 우리는 반복적으로 그 패턴을 본다—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분리하시고, 하나님이 이름하시며, 하나님이 그것을 '좋다'고 부르신다. 이것은 목적과 소명을 이해하는 본래의 틀이다.

Narration

무대 설정

여호수아 1장은 한 영웅, 교훈, 또는 성전으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하시는 창조주와 함께 성경을 엽니다. 서막은 원시적 캔버스를 펼칩니다. ‘혼돈하고 공허하며’(히브리어 '토후 와보후') 어둠에 덮이고, 하나님의 '영' 혹은 '바람'만이 불어오는 땅. 이 날것의 무형(無形)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은 열 번 말씀하십니다('빛이 있으라'), 분리하시며, 이름 붙이시고, 평가하십니다. 20절이 끝날 무렵, 동물과 인류가 아직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생명 자체를 위한 무대가 준비됩니다. 이 본문은 소명에 관한 모든 신학의 토대가 됩니다. 그것은 목적이 인간의 열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말씀에서 비롯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반복되는 어구는 피조에 도덕적 리듬을 부여합니다. 목적은 자의적이지 않으며 선(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바질리우스 대제(다섯째 날의 Hexaemeron)를 포함한 초대 교부들은 이 엿새를 기독교 삶의 패턴으로 해석했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무형(無形)에서 결실로 나아가는 의도적이고 질서 있는 여정입니다. 후보 시대나 지리적 단서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이 본문을 가장 넓게 정경적 맥락 속에 위치시킵니다. 고대 근동의 우주관과 소명관에 비추어 본 인류의 원사(原始史)에 자리합니다.

부르심의 공간과 시간

창조 시대와 족장 시대는 하나님의 인간과 개인에 대한 목적이 창조와 언약을 통해 처음 확립된, 명시되지 않은 태초의 배경이다.

본문의 의미

이 스무 구절에서 세 가지 신학적 리듬이 나타납니다. 각각은 목적과 소명을 묻는 데 핵심이 됩니다. 첫째, 소명은 어둠 속에서 시작됩니다. 성령이 물 위에 임하지만 아무것도 형태를 갖추지 못했습니다. 소명은 드물게 명확함으로 시작됩니다. 신학자 프레드릭 뷔크너는 유명하게 소명을 "당신의 깊은 기쁨이 세상의 깊은 필요와 만나는 곳"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창세기 1장은 더 이전의 시작점을 제시합니다. 소명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수 없고, 자아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으며, 하나님만이 최초의 충동을 공급하시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성경에서 가장 결정적인 소명들 — 모세의 불떼 옆 무한, 성전의 사무엘 무한, 다메섹 길의 바울 무한 — 은 대부분 혼란, 두려움, 또는 무능함으로 시작되었으며 자기 소유감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둘째, 소명은 말씀으로 주어집니다. 이 장에서 우리는 열 번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라는 표현을 읽습니다. 목적은 인간의 의지에서 솟아오르지 않고, 신적 말씀에서 내려옵니다. 이것은 우리를 두 가지 오류에서 보호합니다. 헛된 야망으로 우리의 소명을 우리가 발명해낸다고 믿는 것에서 우리를 막아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소명이 운명이나 가족에 의해 고정되었다고 믿는 것에서도 우리를 막아줍니다. 하나님의 "빛이 있으라!"는 창조적 말씀입니다 —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존재하게 합니다. 당신의 소명은 당신에게 주어진 살아 있는 말씀이지, 당신이 자신을 억지로 맞추어야 하는 고정된 범주가 아닙니다. 셋째, 소명은 선합니다. 거의 모든 창조 행위 후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시더라"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어 톱(tob)은 미적인 것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의미도 포함합니다. 목적은 도덕적으로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거나,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부인하거나, 하나님의 드러나신 성품을 모순하는 소명은 이 본문과 조화될 수 없습니다. 창조된 것들의 선함은 모든 벤위의 기초입니다 — 음식을 기르는 농부, 마음을 형성하는 교사, 아픈 이를 돌보는 간호사, 아름다움을 기를 내다보는 예술작가 — 모두 그 기원이 "좋다"인 소명에 참여합니다.

오늘 삶으로 실천하기

우리의 삶이 '형성되지 아니하고 공허한' 상태에 더 가까울 때, 어떻게 '심히 좋았더라'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1. 움직이기 전에 완전한 명료함을 요구하는 것을 멈추라.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5년 전략 계획을 주신다고 묘사하지 않는다. 한 번에 한 말씀씩 말씀하시고 그 결과를 기다리신다고 묘사한다. 넷째 날이 첫째 날보다 먼저 나타나지 않는다. 당신이 있는 그곳에서 시작하라. 다음으로 해야 할 신실한 일을 행하라. 빛은 종종 말씀 이후에 오지, 말씀 이전에는 오지 않는다. 2. 말씀하신 음성에 귀 기울이라. 자기 브랜딩과 자기 발견이라는 시끄러운 시대에, 소명은 더 큰 자기 대화가 아닌 기도, 성경, 지혜로운 충고, 성령의 조용한 인도 안에서 발견된다. 행동할 공간을 마련하기 전에 먼저 들을 공간을 만들라. 3. 당신의 시간을 선물로 받으라. 14절은 등불들이 '징조와 절기'를 위함이라고 말한다. 만일 하나님이 시간을 창조하셨다면, 당신 삶의 어떤 계절도 낭비되지 않는다—생산적이지 못한 계절조차, '혼돈'의 계절조차 그렇다. 그것들은 아직 안에서 볼 수 없는 구조의 일부이다. 4. 선함으로 당신의 소명을 시험하라. '내가 이 일에 잘 맞는가?'뿐만 아니라 '이 일은 선한가?'라고 자문하라. 당신의 일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가? 그것은 세우고, 심고, 치유하고, 비추는가? 기술적으로는 성공적이지만 도덕적으로는 부패한 직분은 창조를 계속해서 '좋다'고 부르신 분의 걸음과 어긋난다. 5. 당신은 첫째 날이 아니라 여섯 날의 일부임을 기억하라. 창세기 1장의 소명은 공동체적이고 축적적이다. 초목이 태양의 길을 준비한다. 하늘이 새들의 길을 준비한다. 당신의 소명은 아마 다른 사람들을 포함할 것이며, 한 계절 이상이 지나서야 보일 수 있다. 하나님의 느린 역사를 신뢰하라.

되새김

하나님이 침묵 가운데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어떤 형상도 존재하기 전, 어떤 이름도 발설되기 전, 빛이나 땅이나 생명이 있기 전, 말이 있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이다.' 다 우주에서만 보이는 가장 의미 있는 행위에는 그 말이 그 시작이었다. 자신의 소명을 찾는 우리들은 종종 자신 안에서 징표를 찾는다—우리의 재능, 우리의 환경, 우리의 욕망. 그러나 창세기 1장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말한다. 소명은 우리의 발이 아니라 하나님의 발에서 흐르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다. 우리는 우리 삶의 첫 번째 저자가 아니다. 우리는 두 번째 저자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들을 귀가 있기 전에 이미 말씀하시고 계셨던 그 음성에 응답하는 자들이다. 여기에는 위로가 있다. 땅은 스스로를 정돈하지 않았다. 빛은 스스로를 점화하지 않았다. 물은 스스로를 모으지 않았다. 누군가가 말씀하시고 있었고, 그는 침묵하지 않고 계셨다. 열 마디 말씀으로 창조를 열으신 그 하나님이 여전히 그를 신뢰하는 자들의 삶에서 새로운 장을 여신다.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고 느껴진다면, 당신은 그 장의 초입에 있을 뿐일 수 있다. 공허하다고 느껴진다면, 당신은 빛이 임하기 전날에 서 있을 수 있다. 빛과 어둠을 분리하신 그이가 당신의 소명을 당신의 혼란으로부터 분명히 분리하실 능력이 충분하신 분이다. 오늘의 기도를 이것으로 삼으라. '말씀하소서, 주님. 신의 종이 듣고 있사오니—그리고 주께서 이루시는 모든 것이 선하심을 믿나이다.'

자주 묻는 질문

만일 내가 여전히 내 소명을 알지 못한다면, 창세기 1장은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여러분은 아직 '첫째 날'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땅은 형체가 없고 공허였습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만물을 창조하시며, 여러분의 현재 혼돈 속에서도 창조하실 수 있습니다. 여섯째 날로 뛰어넘으려 하기보다는, 오늘 주신 한 '말씀'에 신실하게 응답하는 데 집중하십시오.

피조물의 '선함'이 모든 소명이 반드시 선하거나 성공적이라는 뜻인가?

정확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의 '좋은'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만들어 내신 것의 본질적 성격을 설명하는 것이지, 우리가 현대적으로 이해하는 '성공'의 의미가 아닙니다. 소명은 그 기원과 목적에 있어 좋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실패하거나, 고통을 겪거나, 그 실행 과정에서 파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선함은 소명의 근원에 속하는 것이지, 반드시 우리가 그것을 수행하는 것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 소명과 세상의 일 사이에 차이가 있는가?

창세기 1장은 그러한 구분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땅이 풀을 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농업, 양육, 생태는 신성한 행위입니다. 창조의 '선함'에 부합하는 정직한 일은 모두 소명의 정당한 표현입니다. 성직/세속의 분리는 나중에 생긴 문화적 층이지, 창세기의 논리가 아닙니다.

HomeDiscoverBibleStudy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