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위로

부서짐 아래의 부드러운 음성: 고난과 위로

예루살렘이 황폐하게 될 때, 선지자 이사야는 선포한다: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보존하신다.

BibleVibe Editorial읽기 5분
번역본:ESV
이사야 1:1-20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의 묵시이니, 그가 유다의 왕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예언한 것이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자녀로 양육하며 키워 냈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도다. 소는 그 주인을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거늘,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며, 내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아아, 죄 많은 나라여, 죄악에 짐진 백성이여, 행악자의 자손이여, 패괴한 자녀이여,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자를 멸시하며, 등을 돌렸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더 매를 구하며, 계속 죄를 범하느냐. 머리부터 발까지 성한 곳이 없도다. 상처와, 맞은 흔적과, 곪은 종기뿐이라, 짜내지 못하고, 싸매지 못하고, 기름으로 무르게 함을 받지 못하도다. 너희 땅은 황무지가 되었고, 너희 성읍은 불타서, 너희 눈앞에서, 너희 토지 소출이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니, 이방인에게 무너뜨림 받은 황무지와 같도다. 아담한 시온이 포도원의 초막같이, 오이밭의 장막같이, 포위당한 성과 같이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생존자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고, 고모라와 같이 되었으리라. 너 소돔의 두목들이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너 고모라의 백성이여, 우리 하나님의 교훈을 들으라. "내가 너희 모든 제사를 무엇에 쓰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과, 수소의 피에 배불러, 어린 양과 숫염소의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려고 나아오는 것을, 누가 너희에게 구하였느냐. 내 뜰을 밟지 말라. 예물을 가져오는 것이 헛되니, 분향하는 것이 내게 가증하도다. 초하루와 안식일과, 절기를 선포하며, 죄악이 섞인 회집을 내가 견딜 수 없노라. 너희 초하루와 정한 절기들이 내게 싫증나니, 그것들이 내게 짐이 되어, 내가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너희가 너희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돌이키겠고, 너희가 많이 기도하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 손이 죄악에 더러움이니라. 너희 스스로 깨끗이 씻어서, 너희 악행을 내 눈에서 치우며, 악을 행하기를 그치고, 선을 행하기를 배우며, 정의를 추구하며, 압박 당한 자를 돕고, 고아의 권리를 세우며, 과부의 원인을 변호하라."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될 수 있으며, 그것들이 양털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될 수 있느니라. 너희가 만약 순종하고 들으면, 너희가 땅의 좋은 것을 먹으리라. 그러나 너희가 만약 거절하고 반역하면, 너희가 칼에 삼켜지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친히 말씀하셨음이라. 아아, 그녀가 음녀가 되었도다, 의로 충만하던 신실한 성읍이, 의가 거하던 곳이, 그러나 이제는 살인자들이 되었도다. 너희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너희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너희 관원들은 도적들이며, 도둑의 동료들이니, 각기 예물을 탐하고, 뇌물을 탐내며, 고아의 사건을 재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원인이 그들에게는 도달하지 아니하도다. 이는 주인이시며, 만군의 여호와시며,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단언하셨느니라. "아, 내가 내 원수들에게서 만족을 얻겠고, 내 원수들에게 보복하리라. 내가 내 손을 너희에게로 돌이켜, 너희의 찌꺼기를 잿물로 정련하여, 너희의 모든 슬래그를 제거하리라. 내가 너희 재판관을 전과 같이 회복시키겠고, 너희 모사를 옛날 같이 회복시키리라. 그 후에 너는 의의 성읍이요, 신실한 성읍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시온은 심판 가운데서 구원을 받겠고, 그 회개하는 자들은 보응 가운데서 구원을 받으리라. 그러나 반역자와 죄인은 함께 짓밟히겠고, 여호와를 버리는 자는 멸망하리라. 참으로, 너희가 탐낸 상수리나무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겠고, 너희가 사모한 동산 때문에 수치를 당하리라. 이는 너희가 잎이 마른 상수리나무 같이 되겠고, 물 없는 동산 같이 되리라. "쌓아 둔 재물이 ḥasan '쌓다'(23:18), 그리고 ḥosen '보화'(33:6)와 같이 실 같게 되겠고, 그것을 쌓은 자는 불씨 같이 되리니, 그 둘이 함께 불타서, 끌 사람이 없으리라."

이사야 1장 1-20절은 유다에 대한 '대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짜내지도, 씻지도, 싸매지도 않은 상처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인 백성을 고발하십니다 — 그러나 바로 다음 숨결에 그분은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정결하게 하라." 고난과 위안이 같은 단락 안에서 함께 묶여 있습니다. 상처 입히시는 하나님이 바로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Narration

문맥: 문 앞에 놓인 상처들

이사야는 날짜가 아닌 네 왕의 이름 —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 으로 시작하여 40여 년에 걸친 유다의 역사를 감싼다. 이 환상은 정치적 불안정, 우상숭배, 점점 다가오는 앗시리아의 압력이라는 배경 위에 도래한다. 이러한 긴장된 순간에 이사야는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불러내어 '범죄한 나라'(고이 하타트), '죄악이 무거운 백성'(암 카베드 아원)에 대항하게 하도록 명령받는다. 그 언어는 법정식이다: 하나님은 속삭이시지 않으며, 증거물을 펼쳐놓고 계신다. 치료되지 않은 상처로 덮인 나라의 형상 — 타박상, 멍, 곪은 종기 — 은 단순한 비유를 넘어선다. 아하스 아래에서의 앗시리아의 최근 침입은 이미 성읍들의 인구를 감소시켰고, 시골은 약탈자들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7절: '이방인들이 너의 눈앞에서 너의 땅을 삼키는도다'). 그러나 선지자는 병리적 진단에 머무르기를 거부한다. 상처를 다 기술하기도 전에 그는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에 대해 말한다 — 이것은 앞으로 오실 분이 동시에 상처 입은 자이자 치료하시는 자임을 가리키는 빠진 긍휼의 표시다. 유다는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되나, 그 판결은 최종 확정되지 않는다: '만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남김을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었었을 것이라.' 이사야의 신학에서 고난은 결코 마지막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남김이 있기 때문이다. 후대의 선지자 자신이 히스기야가 앗시리아의 위협 이후 떨었음을 기록한다(이사야 36–37장); 요세푸스는 《고대사》 12권 5장에서 히스기야의 개혁이 바로 이 신탁 직후에 뒤따랐다는 전통을 보존한다. 고발 속에 숨겨진 위안은 단순하다: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타박 입은 성읍의 이름을 알고 계신다. 그는 소극적으로 지켜보시는 것이 아니라, 붕대를 보내고 계신다.

시공간: 안마당, 문, 상처

첫 성전 시대의 다윗 왕조 아래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이사야는 언약적 불신실의 시기에 사역하며 임박한 심판과 회복의 소망 가운데 나를 다시 여호와께로 불러 모았다.

의미: 설교하는 상처, 기다리는 위로

이사야 1:1–20은 값싸게 풀어지지 않는 신학적 매듭이다. 네 가닥의 실이 이것을 붙들고 있다. (1) 고난은 계시적이다. 붕대로 싸매지 않은 상처는 우연이 아니라 증언이다. 소가 그 주인을 알겠고 나귀가 그의 먹장소를 알겠거늘 — 더 많은 계시를 받은 이스라엘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픔은 관계에 대한 계시이다. 멍의 무늬는 영적 엑스레이처럼 읽힌다. (2) 고난은 동시에 심판적이며 양육적이다. 하나님이 자식을 기르시는 데 쓰신 동사(gadal, 크게 하다)는 다른 곳에서 부모의 양육을 가리키는 그 동일한 동사다. 이사야는 분노한 폭군이 아니라 상처 입은 부모가 "어찌하여 더 채찍질을 구하느냐"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징계는 교육법이며, 그 아픔은 "이제야 들을 것인가?"라고 묻는 것이다. (3) 위안은 조건적이며 언약적이다. 결정적인 구절은 "오라 이제 함께 의논하자"(18절)이다. 포옹이 곁에 있는 법정 소환장이다. 용서는 상처를 우회하지 않으며, 상처가 인정된 후에 온다. (4) 위안은 궁극적이다. 동사들이 "소돔", "고모라", "온전히 무너뜨리다"처럼 격렬하게 흔들릴지라도, 절정은 그 제의이다 —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될 것이요."고발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빨래하시는 하나님이다. 이사야 1장은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고난은 결코 목적 없는 잔혹함도 아니요, 최종적인 거절도 아니라고 가르친다. 그것은 한 초대 교부사가 나중에 요약한 대로, "고침받는 동치기에 동의하라"고 외치는 하늘의 부름이다. 십자가는 아직 이사야의 지평선 위에 있지 않지만, 그 형상은 여기에 있다 — 상처 입으신 분이 또한 상처를 싸매시는 분이시다.

적용: 상처를 빛 가운데로 가져오기

어떻게 우리가 고발과 세탁제를 한 호흡에 담아두는 이 장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세 가지 움직임이 있습니다. 첫째, 고난을 하나님이 자리를 떠났다는 증거로 다루는 것을 멈추십시오. 이사야의 상처받은 유다는 바로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바로 그 백성입니다. 선지자의 음성 자체가 위로가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고통의 계절을 걷고 있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버리셨는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그 상처를 기도의 빛 안으로 가져왔는지 물으십시오. 숨겨진 상처는 곪게 되고, 이름 붙여진 상처는 하늘의 시선 아래로 가져와질 때 증언이 됩니다. 둘째, 예배를 관계의 대체물로 바꾸는 유혹을 거절하십시오. 이사야는 주변의 구조적으로 취약한 자들을 무시하면서 예배 행위를 늘리는 자들을 향해 맹렬히 책망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의 문 앞에서 피를 흘리도록 고문하시면, 여러분이 '종교를 다 행했다'고 확신하게 만드는 어떤 경건의 패턴이라도 하나님이 '가증한'으로 부르시는 제사입니다. 점검하십시오. 여러분의 일정이 다른 사람을 상처 주면서 스스로를 위안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셋째, 주어진 용서에 동의하십시오. '씻으라', '정결하게 하라', '제거하라', '그치라', '배우라'는 동사들이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습니다. 이사야 1장에서의 용서는 영웅적인 감정적 경험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의지의 행위를 요구합니다. 목욕탕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피 묻은 손이 정결하게 되게 하십시오. 이사야 1장의 위안은 고난의 부재가 아니라, 문 앞에 서서 이르시는 '보게 하라. 내가 치료하겠다'고 말씀하시는 치료자의 임재입니다.

묵상: 짜낸 멍든 자리

하늘이 증인. 땅이 증인. 그다음 하나님이 굽혀 내려오시옵니다. 죄 있는 나라를 책망하시려고 하늘을 여신 하나님이, 그가 드러내신 것을 싸매 주시기 위해 몸을 낮추시는 동일한 하나님이 되시옵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조건 안에서 위로의 신비이니, 그것은 멍을 부인하지 않고 그 위에 기름을 부어주는 것이옵니다.今夜公衆의 믿음 앞에 내놓기에는 너무 보기 흉하여 숨겨 두었던 상처 하나를 이름 붙이시옵니다. 그 가치를 인터넷 앞에나 자신의 찬란한 상상 앞에 들지 말고, '내가 멍을 짜내고, 그것을 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분 앞에 들고 나아가시옵옵니다. 그 가장 깊은 곳에서의 위로는 통증의 갑작스러운 부재가 아니라, 고개를 돌리지 않으시는 치료자의 갑작스러운 현존함이옵니다. 십자가가 아직 세워지지 않았으나, 그 그림자가 이사야 1장 위로 드리워졌으니, 상처가 온전히 치유되도록 그 상처로 자신이 이끄려 가실 어린 양이옵니다. 남은 자가 살아남고, 어린 양이 오시며, 멍은 문이 되옵니다.

자주 묻는 질문

만약이 가이사랑이시라면, 왜 이사야 1장은 심판으로 시작하는가?

이사야의 심판은 붕대를 감기 전에 외과의가 하는 죽은 조직 제거입니다. 그것은 치유를 가리키는 부모의 훈육입니다 — 그 고소 자체가 곧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남은 자의 무리들의 약속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남은 자는 죄 있는 자가 완전히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거절이다. 이길 수 없는 상황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하나의 실을 붙잡아 두신다. 그리고 그 실이 이야기를 앞으로 끌고 가는 밧줄이 된다.

HomeDiscoverBibleStudy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