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위로

부서짐 아래의 부드러운 음성: 고난과 위로

예루살렘이 폐허로 멸망할 때, 선지자 이사야는 선언합니다. 심판 중에도 God는 남은 자를 보존하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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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ESV
이사야 1:1-20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의 예언이라 그가 유다 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였더라.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가 말씀하시되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으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주인을 알며 나귀는 그 주인이 여 먹이는 구유를 알거늘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며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아아 죄악의 나라 허물이 무거운 백성 행악의 자손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심을 능멸하고 돌아섰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더 채찍질하겠느냐 너희가 더욱 범죄하겠느냐 사람 머리마다 상하며 마음마다 병들었으니 발끝부터 머리까지 상처가 없으며 종기나 맞은 자리나 독한 상처뿐이라 짜지 아니하며 싸매지 아니하며 기름으로도 연하게 하지 못하였으니 너희 땅은 황폐하고 너희 성읍은 불에 탔으며 너희 눈 앞에서 이방인이 너희 토지를 삼키니 사마리아의 침략자 같이 황폐하였더라 딸 시온은 포도원의 초막 같고 원장의 움막 같으며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 같으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남은 자를 남기지 아니하시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소돔의 방백들이여 여호와 말씀을 들으라 고모라의 백성이여 우리 하나님의 교훈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너희의 제사를 무슨 많음에 인하겠느냐 나를 위하여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이 이미 족하며 우물의 피와 어린 소와 염소와 숫양의 피를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는 것이 누가 이같이 명하였나니 내 뜰을 밟는 것을 그치라 너희의 불로 드리는 제사가 헛되니 나에게는 분향이 가증하니라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이 죄악과 함께 하는 것이니 내가 견딜 수 없노라 너희의 월朔과 정절이 내 마음에 슬프게 하며 무거운 짐이 되었으니 내가 견딜 수 없노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숨기리니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 하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 손에 피가 있기 때문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을 행하기를 그치고 선을 행하며 학대 받는 자를 위해 정의를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재판하며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될 것이니라 너희가 순종하고 좋으면 땅의 좋은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스르고 도리어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 입으로 말씀하셨느니라 아아 저 신실한 성이 어떻게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 충만하였고 공의가 거기 거하였었거늘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니 너희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희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으며 너의 방백들은 도적과 함께 무리하며 뇌물을 탐내며 은상을 받으며 고아의 송사를 치우지 아니하며 과부의 일이 자기에게 이르게 하지 아니하도다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아 내 원수들에게 보응하리라 내 원한을 내 적에게 갚으리라 내가 손을 돌려 너를 치고 너의 찌끼를 잿물 같이 제거하고 너의 모든 잡물을 빼고 내가 다시 네 재판관을 처음과 같이 세우며 네 모사를 옛날과 같이 두리라 그 후에야 네가 의로운 성 진실한 성이라 일컬음이 되리라 시온은 공의로 구속되며 그 회회하는 자는 의의 결과로 구속을 받으리라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며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하리라 너희가 너희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며 너희 택하던 동산들로 말미암아 부�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는 잎이 마른 상수리나무 같고 물 없는 동산 같을 것이며 너희가 거둔 것은 화로의 심지가 되어 불에 타리니 스스로 살 수 없을 것이니라

이사야 1:1–20은 유다에 대한 '위대한 고발'이다. 하나님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무도 짜내거나 씻거나 매어주지 않은 상처로 덮인 백성을 고발하신다 —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숨결에 초대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어 깨끗하게 하라." 고난과 위로가 같은 단락 안에 함께 묶여 있다. 상처 내시는 하나님이 바로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Narration

문 앞에 남은 상처들

이사야서는 날짜로 시작하지 않고 네 왕의 이름—우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으로 시작하여 사십 년이 넘는 유다 역사를 묶어낸다. 이 환상은 정치적 불안정, 우상숭배, 점차 다가오는 앗수르의 압력이 뒤섞인 배경 위에 도래한다. 이 긴장된 순간에 이사야는 하늘과 땅을 불러 ‘범죄한 나라’(고이 하타트), ‘죄악의 짐을 진 백성’(암 카베드 아원)에 대한 증인으로 세우라 명함을 받는다. 이 언어는 법정적이다. 하나님은 속삭이시는 분이 아니라 증거물을 제시하시는 분이다. 치료되지 않은 상처에 뒤덮인 나라의 이미지—타박상, 부종, 곪는 종기—는 단순한 비유를 넘어선다. 아하스 시대 앗수르의 침공은 이미 성읍들의 인구를 감소시켰고, 시골은 약탈자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7절: ‘이방인들이 당신의 눈앞에서 당신의 땅을 삼키도다’). 그러나 선지자는 병적 현실에 머물기를 거부한다. 상처를 다 묘사하기 전에 그는 ‘기름으로 연하게 됨’을 말한다—이 빠진 긍휼은 앞으로 스스로 상처를 입히고 동시에 치료하시는 분을 가리킨다. 유다는 소돔과 고모라에 비교되지만, 그 판결은 최종 확정되지 않는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남김을 두시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도 소돔과 같이 되었었으리라.’ 이사야의 신학에서 고난은 결코 마지막 말이 아니다. 남김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후대 선지자 자신이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떨었던 일을 기록하며(이사야 36–37장), 요세푸스는 『고대사』에서 히스기야의 개혁이 바로 이 예언에 직접 뒤따랐다는 전통을 전해준다(Ant. 12.5). 고발 속에 감춰진 위로의 말씀은 단순하다.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상처 입은 성읍의 이름을 알고 계신다.祂는 방관하시지 않는다.祂는 붕대를 보내고 계신다.

시공간: 안마당, 문, 상처

첫 성전 시기 다윗 왕조 아래 예루살렘에서 사역한 이사야는 언약적 신의 불신앙이 만연한 시기에 섬기며, 임박한 심판과 회복의 소망 가운데 나를 여호와께로 다시 불러모았다.

의미: 설교하는 상처, 기다리는 위로

이사야 1:1–20은 값싼 방식으로 풀리기를 거부하는 신학적인 매듭이다. 네 가닥의 실이 이를 함께 묶고 있다. (1) 고난은 계시적이다. 붕대로 감기지 않은 상처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증언이다. 소가 그 주인을 알며 나귀가 그 주인의 구유를 알지만 — 더 많은 계시를 받은 이스라엘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아픔은 관계에 대한 계시이다. 타박의 패턴은 영적인 X-ray처럼 읽힌다. (2) 고난은 동시에 심판적이며 부모적이다. 하나님이 자녀를 양육하신다는 뜻으로 사용하신 동사(gadal, 크게 하다/키우다)는 다른 곳에서 부모의 양육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 바로 그 동사이다. 이사야는 분노한 폭군이 아니라 상처 입은 부모가 "어찌하여 더 매를求하느냐"라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훈련은 교육적이며, 그 아픔은 "끝내 들으시겠느냐"라고 묻고 있다. (3) 위로에는 조건이 있으며 그것은 언약적이다. 결정적인 구절은 "오라 이제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18절)로, 포옹을 동반하는 법정 소환장이다. 용서는 상처를 우회하지 않으며 상처가 인정된 후에 온다. (4) 위로는 궁극적이다. 동사들이 "소돔", "고모라", "완전히 전복되다"와 같이 격렬하게 움직일 때조차, 절정은 그 제안이다. "너의 죄가 주홍빛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될 것이다." 고발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빨래하시는 하나님이다. 이사야 1장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어나는 고난이 결코 목적 없는 잔혹이나 최종적인 거부가 아니라, 한 초기 교부(초대 교부)가 나중에 요약한 것처럼, "고침을 받음을 허락하라"는 하늘의 부르짖음임을 가르친다. 십자가는 아직 이사야의 지평선에 있지 않지만, 그 형태는 여기에 있다. 상처 입으신 분은 또한 상처를 싸매시는 분이시다.

적용: 상처를 빛 가운데로 끌어내기

어떻게 같은 장(章) 속에 고발과 세탁제를 함께 담은 삶이 가능하겠는가? 세 가지 흐름이 있다. 첫째, 고난을 하나님이 자리를 떠났다는 증거로 여기지 말라. 이사야의 멸린 유다는 바로 하나님이 찾아오시는 바로 그 유다이다; 선지자의 음성 자체가 위로가 된다. 만일 고통의 계절을 걷고 있다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느냐가 아니라 이 상처를 기도의 빛 속으로 들여왔느냐를 물어라. 숨겨진 상처는 곪게 되나, 이름 붙여 천국의 시선 아래에 놓인 상처는 간증이 된다. 둘째, 관계를 의식으로 대체하는 유혹을 거절하라. 이사야는 예배 행사를 늘려가며 주변의 구조적 약자들을 무시하는 백성을 향해 맹렬히 책망한다. 타인이 당신의 문 앞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데도 스스로 '종교를 행했다'고 확신하게 만드는 어떤 경건의 패턴이든, 그것은 하나님이 '가증하다'고 부르시는 향이다. 살피라: 당신의 일정이 누군가를 상처 내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곳이 어디인가? 셋째, 주어진 용서에 동의하라. '씻으라,' '정결케 하라,' '제거하라,' '그치라,' '배우라'라는 동사들은 놀라울 정도로 온화하다. 이사야 1장에서의 용서는 영웅적인 감정적 경험을 요구하지 않는다 — 그것은 의지(意志)의 행위를 요구한다. 목욕탕으로 들어가라. 핏빛 손이 정결함을 받게 하라. 이사야 1장의 위로는 고난의 부재가 아니라 문 앞에 서서 "내게 보여라. 내가 치료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치료자의 임재다.

묵상: 짜낸 멍 자국

하늘이 증인이요, 땅이 증인이로다. 그리고 하나님이 굽히신다. 죄 많은 나라를 고발하시려고 하늘을 여신 하나님이, 이제는 자신이 드러내신 것을 싸매려 굽히시는 동일한 하나님이 되신다. 이것이 이사야의 언어로 표현한 위로의 신비다. 그것은 상처를 부인하지 않으며, 그 위에 기름을 부어준다. 오늘 밤, 공개된 신앙에 너무 보기 흉하게 느껴져서 숨겨 왔던 상처 하나를 말하라. 그것을 인터넷이나 자신의 밝은 상상이 아니라, "내가 상처를 짜낼 것이요, 싸맬 것이요, 기름으로 부드럽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분 앞에 들라. 위오는 가장 깊이서, 통증의 갑작스러운 부재가 아니라, 고침을 거부하시며 그 곳을 바라보시는 치유자의 갑작스러운 현존이다. 십자가는 아직 세워지지 않았으나, 그 그림자가 이사야 1장을 가로질러 드리워져 있다. 곧 상처로 끌려가시어 그 상처가 온전히 치유되도록 하실 어린 양이시다. 남은 자들이 살아남고, 어린 양이 오신다. 상처는 문이 된다.

자주 묻는 질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분이시라면, 왜 이사야 1장은 심판으로 시작하는가?

이사야의 심판은 붕대를 감기 전 외과의사의 데브리드먼트이다. 그것은 치유를 향한 부모의 훈육이다 — 그 소송 자체가 곧 손을 내미는 것이다.

남은 자들에 대한 약속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남은 자는 죄 있는 자가 완전히 멸망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길 수 없는 상황 한가운데서 하나님은 실 하나를 붙잡아 두신다. 그리고 그 실이야말로 이야기를 앞으로 끌고 가는 밧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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