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위로

하나님의 음성을 조롱 아래에서 듣다: 히스기야의 고난과 위안

앗수리아의 야전사령관 예루살렘 성곽 아래에서 예루살렘을 조롱했을 때, 하나님의 고난받는 백성들은 수치와 굴욕 속에서 어떻게 위로를 얻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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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ESV
이사야 36:1-20

히스기야 왕 제십사년에 앗시리아의 산헤립 왕이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들에 올라 쳐서 그것들을 빼앗았다. �시리아 왕이 라기시에서부터 큰 군대를 거느리고 랍사게를 예루살렘의 히스기야 왕에게 보냈다. [랍사게가] 세탁장의 밭 길 옆에 있는 위쪽 못의 수로 곁에 이르렀거늘, 궁리를 맡고 있는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과 서기관 셔브나와 아삽의 아들 요아 기록관이 그에게로 나가니, 랍사게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말하라. 앗시리아 왕 곧 대왕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는 무엇을 의지하므로 그리 담력이 있느냐? 내가 듣기로는 말만으로 전쟁의 모략과 용맹을 내는 자로다. 너는 누구를 의지하므로 나를 반역하였느냐? 보라, 너는 애굽 곧 그 의지하는 자의 손바닥을 찌르는 부러진 갈대 지팡이를 의지하도다. 애굽의 바로 왕이 그를 의지하는 모든 자에게 이러하니라. 네가 네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의지한다 하자. 이는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산당들과 제단들을 제하여 버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이르기를 '너희가 이 제단 앞에서만 경배하라' 하였던 바로 그 여호와니라. 이제 내 주인 앗시리아 왕과 내기를 하라. 만일 네가 그것에 탈 사람을 낼 수 있으면 내가 너에게 말 이천 필을 주리라. 너의 주인 종의 작은 관원에게도 너희가 애굽을 의지하여 병거와 마병을 구하니 어찌 그 얼굴을 거절할 수 있으랴. 내가 어찌 신(神) 없이 이 땅에 올라와서 멸하려 하였느냐? 여호와께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그 땅에 올라가서 그것을 멸하라' 하셨느니라." 엘리아김과 셔브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청컨대 너의 종들에게 아람어로 말하라. 우리가 그것을 알아듣겠노라. 성벽 위에 있는 백성이 듣는데 우리에게 유다어로 말하지 마옵소서." 하였으나, 랍�사게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 주인이 나를 보내시어 이 말씀을 하시도록 한 것이 네 주인과 너에게만 하신 줄로 생각하느냐? 성벽 위에 앉은 사람들 곧 너희와 함께 너희의 �을 먹고 오줌을 마실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고, 랍사게가 일어나 유다어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시리아 대왕의 말씀을 들으라. 왕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히스기야에게 속아서 너희를 구원하리라 믿지 말라. 그가 너희를 구원할 수 없으리라. 히스기야로 너희가 여호와를 의지하게 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가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실지라. 이 성이 앗시리아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지 못하게 하라.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시리아 왕이 이같이 말하노라. 나와 화친하고 나에게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먹고 우물물 마시리니, 내가 장차 너희를 너희의 땅과 같은 땅 곧 곡식과 포도주가 있는 땅, 곡식 밭과 포도원이 있는 땅으로 데리고 가리라. 히스기야가 이르기를 '여호와가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 하여 너희가 그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열방의 신들 중에 어느 신이 그 땅을 앗시리아 왕의 손에서 건져냈느냐? 하맛의 신들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스발와임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내 손에서 그들의 나라를 건진 신들이 이 모든 나라의 신 중에 어느 신이 있느냐. 하물며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시겠느냐?" 하였으나, 그들은 잠잠하고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명령하여 "그에게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라. 이에 궁리를 맡고 있는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과 서기관 �브나와 아삽의 아들 요아 기록관이 그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이르러 랍사게의 말을 아뢰었다.

이사야 36:1–20은 센나케립을 대신한 랍사게가 예루살렘에 가한 심리적 포위 공격을 기록하고 있다. 이 본문은 이미 압박 속에 있던 백성 위에 세 가지 조롱—군사적 약점, 신학적 비방, 그리고 신적 승인을 자처하는 주장—를 겹쳐 놓는다. 여기서의 고난은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말로 이루어지고, 공개적이며, 믿음의 핵심을 겨냥한다. 이 장의 위안은 서사 속에서 늦게 오지만, 조롱받는 그 하나님이 바로 통치하시며 응답하실 분이라는 조용한 확신에 있다.

Narration

역사적 배경: 히스기야 왕 제14년

이사야 36장은 우리를 정확한 순간에 서 있게 한다: 유다의 히스기야 왕 원년은 아니지만 히스기야 통치 14년, 앗시리아의 산헤립이 유다의 요새화된 성들을 휩쓸고 마침내 심리적 무기를 예루살렘 성문으로 보낸 때이다. 랍삭—아마 단순한 통역이 아니라 고위 조정 관리—윗못 가에 자신을 자리 잡았으니, 이 곳은 이 전에 이사야가 아하스에게 조언하던 바로 그 장소이다(이사야 7:3). 지리학은 의도적이다: 이것은 언약적 결정들이 저울질 되는 바로 그 땅이다. 그를 맞으러 보낸 사절단이 시사적이다. 힐기야의 아들 엘리아김, 서기관 셋나, 그리고 기록관 요아는 이사야 22장에 언급된 바로 그 삼인조로, 거기서 셋나는 심판받고 엘리아김은 다윗의 열쇠를 받는다. 그들은 이미 우상승배를 제거하고 주님을 신뢰한 왕의 명령 아래 나간다(열왕기하 18:4-7), 그리고 즉시 그 신뢰를 해체하도록 설계된 네 가지 조롱을 만난다: (1) 공허한 말은 전략이 아니다, (2) 애굽은 부러진 갈대이다, (3) 히스기야가 스스로 산당을 헐었기에 YHWH를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4) 주님 자신이 앗시리아의 침략을 명하셨다. 이 장의 고난은 공동적이며 시민적이며 청각적이다. 성벽 위의 남자들(11절)이 고난받는 청중이다. 랍삭은 그들이 그들의 대변을 먹이고 자신들의 소변을 마시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이 절들에서는 아직 위로가 명시되지 않는다—이어지는 장들에서 온다—그러나 역사적 맥락은 독자에게 그 성이 함락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시킨다. 요세푸스는 더 넓은 캠페인과 포위군의 갑작스러운 철수를 기록하는데, 정경 서사가 신적으로 구원하는 것으로 신학적으로 해석할 세부 사항이다.

시공간 배경: 상층 못의 도관

이사야 36장은 첫 성전 시대에 배경하며, 다윗의 도시 예루살렘과 니느웨에서 온 앗수르의 위협 사이의 지정학적 긴장을 다루고 있다.

뜻: 고난의 세 가지 모습과 위로의 예고

이사야 36:1–20의 고난은 세 가지 신학적 유혹을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으며, 각각은 이사야서의 나머지 부분이 펼쳐 낼 соответствующий 형태의 위안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 무의미함의 유혹입니다. '그저 말뿐'으로는 너를 구원할 수 없다고 랍사게가 말합니다. 여기서 고난이란 말과 계획과 회의가 충분하지 않다는 경험입니다. 이에 답하는 위안은 밤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입니다. '가만히 있어라, 내가 하나님인 줄 알라'(시편 46:10). 이사야는 후에 이렇게 선포할 것입니다. '처녀 딸 시온이 너를 업신여기고 너를 비웃었느니라'(이사야 37:22). 주님은 앗시리아의 수사(修辭)를 해체하시는 말씀으로 응답하실 것입니다. 둘째, 잘못된 신뢰의 유혹입니다. 이집트는 부러진 갈대이며, 세계는 항상 그것에 의지하는 손을 상처 입힐 것입니다. 여기서 고난이란 인간의 동맹이 우리가 기대하는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는 아픈 발견입니다. 위안은 그리스도의 초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태복음 11:28), 그리고 바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서 만날 수 있는 도움이시라'(시편 46:1; 고린도후서 1:3–4에서 모든 참된 위안의 문법으로 인용됨). 셋째, 가장 깊은 상처입니다. 하나님 친히 당신의 백성 편이 아니라는 암시입니다. '날이 이르라니 이 나라를 치러 올라가라 하신 이는 나 여호와시니라.' 이 수준에서의 고난은 신학적인 것입니다. 하늘이 우리의 재앙에 서명을 했다는 느낌입니다. 이미 7절에 내재되어 있는 위안은 앗시리아를 보냈다고 여겨지는 그 하나님이 바로 '히스기야가 그의 성소들과 제단들을 폐한' 바로 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곧, 장소가 많아지는 것보다 순종하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입니다. 히스기야의 개혁은 신적 불쾌의 증거가 아니라 신적 열정의 증거입니다. 위안은 이것입니다. 주의 징계와 주의 위안은 영원히 대립하지 않습니다. '대저 주께서 영원히 버리시는 않으시나니 비록 슬프게 하실지라도 그 무한한 인자의 풍부함대로 궁휼히 여기시리로다'(예레미야애가 3:31–32). 이 본문은 고난받는 자를 성벽 아래, 입을 닫고 귀가 울리는 채로 남겨둡니다. 그러나 그 발밑의 땅은, 이 장이 끝나기 전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로 그 장소가 될 것입니다.

적용: 조롱 아래에서 위안을 찾기

1. 그 음성을 규정하라. 랍사게의 전략은 소음으로 압도하여, 당신이 누구의 음성에 순종하도록 만들어졌는지를 잊게 만드는 것이다. 고난이—당신의 약함, 어리석은 선택, 부족한 자원에 대한—비난의 폭풍처럼 닥쳐올 때, 멈추고 물으라: '이것은 누구의 음성이며, 나는 누구의 자녀인가?' 이 적용은 officials들이 아람어로 요청할 때 모범을 보이는, 주님 앞에서의 침묵의 훈련이다. 모든 논쟁을 적이 선택한 언어로 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2. 파편을 거부하라. 이집트는 항상 합리적인 동맹처럼 보일 것이다—친숙하고, 가까우며, 인상적이다. 그러나 '쪼개진 갈대'에 기대는 것은 모두 미리 지불된 상처이다. 이 적용은 정직한 감사이다: 내가 주의 이름이 아니라 전병과 군마에 어디서 기대고 있는가(시편 20:7)? 고난은 종종 잘못 기댄 데서 시작된다; 위안은 종종 고백에서 시작된다. 3. 신에 대한 교리가 신에 대한 교리를 바로잡게 하라. 이 장에서 가장 불안을 주는 구절은 '이것을 내게 이르신 이는 나뿐인즉 여호와시니라'이다. 고난은 우리에게 가르힌다—섭리와 허락이 승인과 같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은 앗시리아인을 사용하시되 앗시리아인이 되시지는 않는다. 이 적용은 가장 힘든 섭리를 순간의 보도자료가 아니라 더 큰 정경을 통해 읽는 것이다. 히스기야가 이사야 37장에서 그 일을 행한다—산헤립의 편지를 주님 앞에 펴서 비웃음을 기도화한다. 4. 담장 위에 앉아 계속 먹으라. 담장 위의 시민들은 '자기의 분뇨를 먹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이 적용은 성찬적(Eucharistic)이다: 가장 어두운 시간에 주님은 이 세상이 알지 못하는 떡을 그의 백성에게 주신다. 이사야 55:2가 이 장면 뒤에 있다: '어찌하여 너희가 돈이 아닌 것에 돈을 쓰며 만족하지 못할 것으로 만족을 구하느냐?' 그리스도인의 위안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먹이신 주님(신명기 8:3)이 포위당한 교회를 먹이시는 동일한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5. 지연을 신뢰하라. 이 본문의 위안은 지체된다. 이사야 36장은 긴장 속에서 끝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위안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상처의 순간에가 아니라 뒤따르는 긴 순종 속에서 온다. '저녁에 우박이 있으나 아침에는 기쁨이 있느니라'(시편 30:5).

되새김

이사야 36장이 성경 정경에서 배치된 것에는 기이한 섭리가 있다. 이 장은 약속의 35장 다음에, 구속의 37장보다 앞에 놓여 있다. 독자는 대적이 가장 큰 소리로 말하는, 이야기의 가장 나쁜 부분—답변이 도래하기 전의 그 부분—에 머무르도록 요청받는다. 어쩌면 이것은 긍휼일 것이다. 어쩌면 이 배열을 영감하신 성령님은 우리 삶의 대부분이 37장이 아니라 36장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아실지 모른다. 우리는 포위당한 백성으로서, 황폐를 약속하는 목소리들을 듣고, 아직 응답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본문의 위안은 랍사개의 부재가 아니라 다른 대화의 현존이다. 앗시리아 사람이 외치는 동안, 이사야는 성전에 있다. 관리들이 협상하는 동안, 주님은 왕좌에 앉아 계신다. 성이 두려움을 삼키는 동안, 하늘은 식사를 준비하고 계신다. 이 패턴은 바울이 고린도후서 1장 3–7절에서 묘사한 것과 같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 곧 긍휼의 아버지와 모든 위안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안하사 우리로 하여금 어떤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안하심으로 위안할 수 있게 하시는도다.』 고난이 마지막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대부분은, 문 앞의 현관에 불과하다. 그러니 당신의 이사야 36장을 주님께 가져오라. 히스기야처럼, 편지를 성소 바닥에 펼쳐 놓으라. 대적의 조롱이 성도의 기도가 되게 하라. 그리고 기다리라—왜냐하면 랍사개의 말 끝을 내버려 두신 하나님은, 한 장 뒤에서 그의 행진을 끝내지 않으실 바로 그 하나님이시니.

자주 묻는 질문

�사게가 히스기야가 신뢰하는 하나님을 왜 조롱합니까?

랍사게는 믿음의 근원을 공격하여 사기를 무너뜨리려 한다. 백성이 자기 신이 자신을 버렸다고 믿게 될 때, 성벽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 이것이 가장 깊은 층위의 고통, 곧 신학적 유기(神學的遺棄)에 대한 감각이다.

이집트가 어찌하여 부러진 갈대에 비유되는가?

이집트의 약속은 견고해 보이지만 압박이 닥치면 그 약속에 기댄 자의 손을 찌른다. 라브사개의 말에는 영적인 진실이 담겨 있다. 인간의 안전은 종종 적을 찌르기 전에 그것을 의지하는 자 스스로를 상처 입힌다.

이 구절에서 위안은 어디에 있습니까?

위안은 이야기 속에서 지연되지만 그 구조 안에 내재되어 있다. 말씀은 가장 어두운 순간에서 멈추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게 하신다. 참된 위안은 이것이다. 주님은 원수가 말하는 것을 끝까지 내버려 두시지만, 원수가 행진하는 것을 끝까지 내버려 두시지는 않는다.

히스기야는 이 고난에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는 항변하지 않았으며 애굽에 의지하지도 않았다. 그는 성전에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놓고 기도하였다. 고난 이후의 첫 번째 행동은 반박이 아니라 예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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