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과 부르심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소명에 대한 방향을 찾기

욥기 9장은 하나의 진리를 드러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우리의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BibleVibe Editorial읽기 5분
번역본:ESV
욥기 9:1-20

욥이回答说 그것을 내가 잘 아나니 사람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겠으며 그와 변론하자 할지라도 대답할 말이 일천에 하나도 없도다 마음이 지혜로우시고 권능이 많으신 자를 누가 능히 거스르며 형통하겠느냐 산을 옮기시되 그 산이 주를 모르는 중에 옮기시고 진노 중에 넘어뜨리시며 땅을 그 자리에서 흔드시되 그 기둥들이 떨게 하시며 해를 명하여 비치지 못하게 하시며 별들을 봉인하시고 하늘을 홀로 펴시며 바다 깊음을 밟으시고 과부자리와 오리온과 플레이아데스와 남방 궁창을 지으신 자이며 나의 측량할 수 없는 큰 일과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자라 내가 그 앞에 지나가나 보지 못하고 지나가심을 알지 못하오니 그가 잡아가실 때에 누가 능히 막으며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물을 자가 있겠느냐 라합의 보좌들도 그 앞에서 무너지니 이는 그가 노를 그치지 아니하심이라 내가 어찌 능히 대답하겠으며 무슨 말을 택하여 변론하겠으며 의로운즉 내가 입을 열지 못하겠고 심판자를 껴안으며 구하여야 할지로다 내가 불러도 대답하시지 않겠으니 그럴지라도 내가 그 소리를 들으리라 그가 나를 까닭 없이 치시며 내 허물 없이 상처를 많이 내시며 내 기운을 못 쉬게 하시고 나를 쓴 것으로 채우시나이다 권능의 시험을 요구하리라 그는 강하신 자라 재판의 시험을 요구하리라 누가 나를 위하여 때를 정하겠느냐 내가 의로운즉 나의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내가 완전한즉 그가 나를 패악하게 하리라 내가 의로우나 스스로가 낙심하고 내 인생이 괴로우니 이 모든 것은 하나이니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의인과 악인이 함께 멸하리라 하나님이 돌연한 재앙을 내려 죽게 하시며 무죄한 자의 패함을 비웃으시며 세상 악인에게 그 땅을 붙이사 재판장들의 눈을 가리시나니 만일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행하겠느냐 내 날이 역자보다 빨리 지나가니 복락을 보지 못하고 지나가되 그들이苇船같이 지나가며 독수리가 그 먹이를 향해 내려치듯 지나가도다 내가 가로되 내 원망을 잊고 얼굴을 바꾸어 즐거워하리라 하면 내가 모든 재앙을 두려워하고 너는 나를 무죄하지 아니하실 줄 아노니 내가 죄를 지은즉 어찌 힘써 헛되이 하리라 내가 잿물로 씻고 잿물로 내 손을 깨끗이 하리라 너는 나를 개천에 빠뜨리시며 내 의복이라도 나를 싫어하리라 그는 나 같은 사람이 아니라 내가 능히 대답하거나 함께 재판을 받을 자가 아니요 우리 사이에 판결하는 자도 없도다 만일 그 막대기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그 위엄으로 나를 놀라지 않게 하시면 그 때에 내가 담대히 말하리라 나 스스로가 그런 줄 아니까

욥기 9:1–20 (ESV).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권능에 대한 욥의 고백과 자기 의롭게 함의 불가능은, 공로가 아니라 긍휼로 말미암아 궁극적으로 밝혀지는 인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한 문이 된다.

Narration

맥락

욥기 9장은 욥과 그의 세 친구 사이의 시적 대화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 배경은 족장 시대의 우스 땅(아마도 에돔이나 아라비아 안이나 그 부근)이며, 그 이름 자체인 '우스'는 거리, 상담, 계획을 암시한다. 욥은 바로 직전 빌답에게 몰래 죄를 지었다는 비난을 받았고, 9장에서 욥의 대답은 조용한 인정('진실로 내가 알고 있나니 그러하다')으로 시작하여, 성경에서 가장 장엄한 신의 능력을 묘사하는 장면 중 하나로 폭발한다. 곧 산을 움직이시고, 땅을 진동시키시며, 해를 명하시고, 하늘을 펴시며, 바다를 밟으시는 분. 욥의 위기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접근성에 대한 의문이다. 그는 하나님이 알리지 않고 '지나가시는' 것 같고, 자신의 부르짖음이 응답받지 못하며, 자신이 의롭다 하더라도 판결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내려질 것이라 느낀다. 이것이 인간의 소명에 대한 전체적인 질문의 무대를 마련한다. 하나님이 이처럼 헤아릴 수 없는 존재라면, 어떤 mortal이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우스를 둘러싼 고대 근동 세계관은 폭풍, 별자리, 우주적 질서를 신적인 것으로 여겼다. 반면 욥은 그것들을 모두 도발할 수 없는 한 분에게 귀속시킨다. 이것이 바로 신적 소명의 교리가 심어지는 토양이다. 욥에게 목적은 자가 생성될 수 없으며, 땅의 기둥을 진동시키는 바로 그 하나님에 의해 계시되어야 한다.

시공간

성전 제1시기 배경에서, 이 묵상은 다윗 왕정 아래 예루살렘에서 전개되며, 임박한 바빌론 유수가 배경이 됩니다.

의미

욥기 9장은 의미의 역설이다. 표면적으로 욥은 소명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내가 어찌 대답하며 무슨 말로 더불어 변론할꼬"(14절). 그럼에도 역설적으로 바로 이 불가능성이 참된 목적 교리의 토대가 된다. 여러 층위가 드러난다. 첫째, 인간의 목적은 스스로 도출될 수 없다. 욥은 그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법적 비유 — 법정, 재판, 소환 — 를 시도하고도 어떤 절차도 하나님 앞에서 mortal한 leverage를 주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소명은 우리가 협상하는 계약이 아니라 우리가 받는 판결이다. 둘째, 목적은 고통과 분리되어서가 아니라 고통을 통해 보존된다. 욥이 하나님이 "내 머리털을 까딱하는 것도 없이 나를 살해하시고 까닭 없이 나를 많이 상하게 하신다"(17절)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불의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意思是 공로와 보상의范畴가 하나님의 목적을 매핑하는 데 사용될 수 없다는 뜻이다. 소명은 밖에서 보면 무의미한 고통처럼 보이는 시절을 요구할 수 있다. 셋째,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목적은 이미 파악한 하나님이 아니라 지나가시는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한다. 욥은 하나님이 "나를 지나가시니 — 나는 알아차리지 못한다"(11절)라고 말한다. 소명은 이해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 신약은 후에 욥이 단지 엿본 것을 완성할 것이다. 즉, 이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재판관이면서 또한 변호인이 되셨다는 것(요한일서 2:1), 그래서 욥이 한탄한 바로 그 불가능함이 그가 침묵을 고발한 그분 자신이 응답하셨다는 것을.

적용하다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이 욥이 묘사하는那样 압도적인 하나님과 어떻게 함께 살 수 있는가? 첫째, 당신의 소명을 논박하려는 시도를 그만두라. 욥의 벗들은 정연한 신정론을 가지고 있었고, 욥 자신은 명료한 논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어느 쪽도 방향을 산출해내지 못했다. 만약 당신이 자기 칭의의 순환 — '나는 충분히 선하다,' '나는 충분히 고난받았다,' '나는 더 나은 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 — 에 갇혀 있다면, 당신은 욥의 실패한 법정을 재연하고 있는 것이다. 그 법정을 회개하라. 둘째, 고난을 자격 상실이 아니라 직업적 지형으로 다루라. 욥 9:18 — '나로 숨을 돌릴 수 없게 하시며, 나를 쓴 것으로 채우시는' 이는 많은 소명을 받은 사람들의 어휘다(모세, 다윗, 바울). 만약 당신의 소명의식이 쓴쓸함과 공존한다면, 그 소명이 자동적으로 거짓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완성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셋째, 욥이 묘사하는 하나님의 우선순제에 비추어 당신의 삶을 감사하라. 그는 산을 옮기시고, 별들을 명하시며, 바다를 밟으신다 — 그러나 그는 또한 '지나가신다' 그리고 '낚아채 가신다.' 이 하나님과 정렬된 목적은 위대한 것들의 맡김과 불가해한 상실의 인내로운 수용을 모두 포함할 것이다. 넷째, 당신의 일상生活を 위대하고 자기 정의된 사명보다는 작은 충실한 일들 위에 세워라. 욥의 날들은 '갈대배'였다 — 연약하고 짧았다. 하나님이 주시는 목적은 드물게 자신을 선포한다. 더 자주 그것은 어둠에 눈이 적응했을 때만 별자리가 드러나는 것처럼, 수십 년의 조용한 충실함 안에서 드러난다.

되새김

욥기 9장의 이 낯설음과 함께 한 발자국 정도 앉아 있는 것이 가치가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주권성을 아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사람이 있으며, 그럼에도 이 두 진리 사이에 그가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있다고 결론 내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도 정확히 이 간극을 경험해 왔습니다. 그들은 태양에 명령하는 하나님을 믿으며, 동시에 마치 그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치시는 듯한 하나님도 믿습니다. 본문은 9장에서 그 긴장을 해소하지 않습니다 — 그 해결은 38-42장에서, 하나님 자신이 회오리바람 속에서 말씀하실 때에만 이루어집니다. 그때까지 욥은 그 역설 안에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르심은 그 역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충성스럽게 머무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욥이 고백한 것을 고백합니다. 산들을 움직이시는 분이 지금은 때때로 우리를 지나치시는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욥이 굳게 붙잡았던 것을 굳게 붙잡습니다. 완전함이 흥정의 수단이 아니라 자세라는 것을. 그리고 우리는 욥이 기다린 것처럼, 땅의 기둥들을 흔드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작은 확신들 또한 흔드실 때까지 기다립니다. 마치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찾아 헤맨 목적이 곧 처음부터 우리를 찾아 헤매시던 분임을 발견할 때까지.

자주 묻는 질문

하나님이 이토록 헤아릴 수 없게 거룩하시다면,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소명을 알 수 있겠는가?

욥기 9장의 요점은 소명을 찾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논리로 그것을 정의하려는 시도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참된 소명은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만큼 드러납니다. 마치 하나님이 나중에 회오리바람 속에서 욥에게 직접 말씀하셨듯이.

욥은 하나님이 자기를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가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부르심을 놓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욥의 인식은 진실이지만, 그것이 최종적인 진리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나가심(패씽 바이)'은 방치가 아니라 그를 더 깊이 찾으라는 초대입니다. 시편 34:15는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심이니라"라고 말합니다 — 이것은 바로 욥이 경험하고 있던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욥은 다만 아직 그 관점에서 그것을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만일 무죄한 욥도 하나님 앞에서 무너짐을 느꼈다면, 고난 중인 성도들이 여전히 인도를 기대할 수 있을까?

욥기 9장의 고난이 이야기의 끝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38장에서 직접 개입하시며, 욥이 "스스로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는" 경험을 통해 그의 방향을 다시 형성하십니다. 고난이 부르심을 무효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종종 부르심을 형성하는 그릇이 됩니다. 모세, 다윗, 그리고 바울 모두가 이 경험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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