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신뢰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양과 목자의 비유를 사용하여 참된 신앙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드러내신다. 곧 그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선한 목자의 음성을 알아차려 따르는 실천됨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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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ESV
요한복음 10:1-20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도적과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양의 목자라. 문지기가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으며 그는 자기의 양을 이름으로 불러 이끌어내되,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양들 앞에 앞서 가며 양들은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그를 따르나, 아는 자는 그를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피하리라, 이는 그들이 아는 자의 음성을 알지 못함이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이 말씀하신 것의 뜻을 깨닫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참으로,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는 양의 문이니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도적과 강도이나 양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문이니, 나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은 오고자 함이 없이 오직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함이요, 나는 이로써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느니라. 양들의 주인이 아니요 품삯 주는 자인 목자가 아닌 자는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며 양을 버리고 도망하니 이리가 양을 빼앗고 헤치며, 그가 도망하는 것은 그가 품삯 주는 자라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내 양도 나를 아는 것은 아버지가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바와 같아서라, 내가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있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으니 그것도 내가 이끌라, 무리도 나의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한 목자에게 되리라. 그러므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내 목숨을 버려 다시 취하려 함이니라. 내 목숨을 내게서 취하는 자가 있으나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내가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취할 권세도 있으니 이 명령을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이 말씀으로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났으니, 그 중의 많은 사람이 말하되 그가 귀신을 지니 미쳤거든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고, 어떤 이는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어찌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그 때에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렀으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의 행랑에서 다니시더라. 유대인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이르되,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불안케 하려느냐? 네가 그리스도라면 밝히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거든 너희가 믿지 아니하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믿지 아니하는 것은 내 양이 되지 못하였음이라.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내가 그들을 알고 그들이 나를 따르며,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 내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지 못하느니라.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유대인들이 예수를 다시 돌로 치려 하여 잡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 받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든, 그 중에 어느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는 것이 아니라 신성 모독을 인하여 하노니, 네가 사람이면서 스스로 하나님이라 함이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하나님이라 하였다 하였거늘,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을 하나님이라 하였고 (성경은 폐하지 못하느니라),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으니 어찌 너희가 신성 모독이라 하느냐?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라. 그러나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을 믿으라, 너희로 하여금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알고 깨닫게 하려 함이라.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으려 하였으나 그가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더라. 예수께서 다시 요단 강 저편 곧 요한이 처음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그에게 나아와 이르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에 대하여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거기서 많은 사람이 그를 믿으니라.

요한복음 10:1-20 — 예수님은 양의 우리와 문, 자기 양들을 이름으로 부르는 목자에 대해 말씀하시며, 도둑들은 오직 도둡하고 멸망시키려고만 온다고 가르치신다. 그는 선언하시되, "내가 양의 문이니라" 그리고 "내가 선한 목자이니라"고 하심으로써, 신앙을 추상적인 신념이 아니라 관계적 신뢰로 세우는 토대를 놓으신다.

Narration

배경: 성전의 그늘 속에서

요한복음 10장은 9장에서의 태어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의 치유와 그 기적을 인정하기를 거부한 바리새인들의 대치 직후에 열린다. 이 강해는 10장 22절에서 후술하듯 정절절(수공절) 기간 중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지만, 강해 자체는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몇 달을 특징짓는 논쟁의 한겨울에 속한다. 듣는 회중은 혼성이다: 어떤 이는 완고한 종교 지도자들이요, 어떤 이는 호기심 어린 순례자이며, 소수 — 눈을 뜨게 된 그 사람처럼 — 는 따르기 시작한다. '양우리' 이미지는 유대인 청중들에게 즉시 친숙했을 것이다. 누가복음 2장 8절은 베들레헴 근처에서 밤에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성전 자체에도 제물로 바칠 짐승들이 지나던 양문(느헤미야 3장 1절)이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목자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깊이 있는 예언적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구약에서 왕들은 그들이 떼를 어떻게 돌보았느냐에 따라 심판받았으며(에스겔 34장 2–4절 참조), 주 자신도 이렇게 약속하셨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울 것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리니 이는 내 종 다윗이라'(에스겔 34장 23절). 예수님은 숨 막히게 당당한 권위로 이 예언적 세계에 들어오신다: 그분은 목자를 가리키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문이요 목자이심을 주장하신다. 1세기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절기 동안 예루살렘의 성문들을 통해 양 떼가 끊임없이 움직이고 큰 양시장이 있었다고 묘사하는데, 이는 예수님의 비유에 구체적인 무게감을 더해준다. 30절의 대담한 주장('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은 바로 이 장의 끝에 나오며, 유대인 지도자들이 즉시 돌을 집어 드는데 — 이는 문제가 목양의 돌봄뿐이 아니라 정체성, 곧 이 갈릴리 목수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인지에 관한 것임을 분명히 한다.

시공간: 예루살렘의 겨울

다윗의 왕국이었던 예루살렘과 그 주변의 베들레헴과 나사렛 마을들이 배경으로, 이스라엘의 메시아적 소망과 하나님의 공급에 대한 일상적 신뢰가 얽혀 있는 목가적 풍경 속에서 이야기가 펼쳐진다.

의미: 듣음과 알음과 따름으로서의 믿음

세 개의 동심원적 주장들이 요한복음 10:1–20을 에워싸고 있으며, 각각의 주장은 신앙의 다른 면을 정의한다. 첫째, 신앙은 **들음**이다. "양이 그의 음성을 듣는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며, "그는 자기 양을 이름으로 부른다"(10:3)고 하신다. 요한복음에서 '듣다'라는 동사는 결코 단순한 청각적 수용이 아니다. 듣는다는 것은 순종하며, 인식하며, 소속됨을 뜻한다. 양들은 목자의 말씀을 분석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의 음성운율을 알아챈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 그들이 "이방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에게서 도망하리라, 이는 이방인의 음성을 알지 못함이니라"(10:5)라고 말씀하시는 이유이다. 신앙은 지적 동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 인식 — 세계의 소음 속에서 한 음성을 분별하는 것을 배우는 느리고 인내로운 작업 — 으로부터 시작된다. 둘째, 신앙은 **들어감**이다. "내가 양의 문이 되노라"고 예수께서 선언하신다(10:7, 9). 선한 목자 이전에 도적들과 강도들이 있었으니, 곧 다른 길로 기어올라온 자들이었다. 대조는 정당성과 오만함 사이, 문을 통한 들어감과 담장을 넘은 강제 진입 사이의 것이다. 문을 통해 들어간다는 것은 그의 조건, 그의 십자가, 그의 속죄적 죽음을 통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10:9). 네 개의 동사에 주목하라: 구원받음, 들어감, 나옴, 꼴을 얻음. 신앙은 정적인 신조가 아니라持续的인 움직임 — 그의 은혜 안에 들어감, 그의 세계로 나아감, 그의 돌봄 아래 양식을 찾음 — 이다. 셋째, 신앙은 **내려놓음과 취하여 올림**이다. "내가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나니"(10:11)라고 말씀하신다. 이리 보고 달아나는 삯꾼과 달리, 선한 목자는 헌신한다. 10:15의 부드러운 디테일이 인상적이다: "내가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노라." 신앙은 단순한 신뢰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신뢰에 응답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내 목숨을 버려 다시 취하려 함이니"(10:17)라고 하신다. '권세'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ἐξουσία, 엑소우시아)가 10:18에 두 번 나타난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취할 권세도 있노라." 이것은 동시에 피해자이시며 승리자이신,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신 주님의 고유한 권세이다. 우리의 신앙은 빼앗길 수 없는 — 오직 내려놓을 수만 있는 — 그런 사랑 위에 rests한다. 마지막으로, 이 본문은 열방으로 확장된다: "내가 이 우리에 있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있는즉, 나도 그들을 인도하여야 하리니, 그들이 내 음성을 들을 것이요,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0:16). 그러므로 신앙은 사적 소유물이 아니라 통합의 부름이다. 유대인 청자들을 이끄는 동일한 음성이 이방인들을 이끌 것이며, 그 결과는 한 목자 아래 한 무리 — 사도행전의 위대한 모임을 예고하는 한 음 — 이 될 것이다.

적용: 오늘날 이 믿음을 살아내기

만일 믿음이 선한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따르는 실천적 능력이라면, 세 가지 훈련이 뒤따릅니다. (1) 들을 공간을 만드라. 시끄러운 시대에 믿음의 첫째 일은 덜어내는 것—우리의 주의를争夺하는 음성들을 잠재워 목자의 음성이 구별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기적인 성경 읽기, 서두르지 않는 기도, 주님의 성찬을 조용히 받는 열매입니다. 양들은 애써 듣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음성이 친숙해질 만큼 가까이 머무는 것입니다. (2) 음성들을 분별하라. 이 장은 "도적이 오는 것은 노략하고 죽이고 멸하게 함이니라"(10:10)라고 경고합니다. 믿음은 순진함이 아닙니다. 베뢰아 사람의 본능(사도행전 17:11)은 우리가 듣는 것을 사도적 증언에 비추어 저울질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약속하면서 두려움을 낳는 모든 음성, 은혜 안에서 안식하기보다 행위를 요구하는 모든 음성은 낯선 자의 음성입니다. 마태복음 7:15는 거짓 선지자들을 경고합니다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믿음은 그 차이를 분별합니다. (3) 자기 목숨을 버리신 목자를 신뢰하라. 근심에 대한 해독은 이리의 부재가 아니라, 이미 아버지로부터 목숨을 버리시고 다시 취하실 권세를 받으신 목자의 임재입니다. 오늘 당신이 무엇에 직면하든, 당신은 고용된 도우미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십자가에서 이미 사랑을 증명하신 목자를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은 어둠 속으로의 도약이 아니라, 당신을 위해 찔리신 분의 품 안으로 들어서는 한 걸음입니다.

마무리 묵상

예수가 자기 양들을 말씀하시는 모습에는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도 나를 아나니 이것은 아버지가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으니라"(10:14-15)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아심은 차가운 전지가 아니옵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서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의 따뜻하고 상호적인 아심입니다. 예수님께 아려진다는 것은 이름으로 불리어 밖으로 이끌려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가장 참된 이름과 가장 참된 초장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이 모든 마음에 누르고 있는 질문은 단순합니다. 오늘 당신의 걸음을塑造하고 있는 것은 누구의 음성입니까? 도적은 지름길을提供합니다. 곧 문을 통해 들어가는 대신 담을 넘는 것입니다. 품삯군은 안전을提供합니다. 그러나 오직 함께하심의 대가를 치르고서만 가능합니다. 선한 목자는 더욱 기이하고 더욱 귀한 것을提供하십니다. 곧 생명을 내려놓으시고 다시 취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당신과 나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10:10)입니다. 믿음은 의심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릇된 음성들이 사라지게 두고 바른 음성이 점점 더 크게 들리게 하는 느리고 날마다의 실천입니다. 오늘 당신이 자신을 발견하는 어떤 양우리 안에서든 — 직장이든, 가족이든, 근심이든, 불확실함 안에서든 — 멈추십시오. 들으십시오. 그가 당신을 이름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자주 묻는 질문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왜 "나는 문이니라"와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는가?

그들은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것이다. 문은 들어가는 통로이고, 목자는 일단 안으로 들어간 후 이끌어가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들어가는 길이시자 또한 양들과 함께 그 길을 걸어가시는 분이시며, 출입을 허락하시고 이후에 초장을 마련하신다.

양들은 어떻게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고, 오늘날 신자들에게 '주의 음성을 듣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고대 근동에서 목자들은 양 무리와 늘 함께 살았기에, 양들은 그 주인 고유의 부르는 소리의 리듬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에게 있어 '주의 음성을 듣는 것'은 성경, 성령의 내적 증거, 그리고 교회의 교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 이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할수록 성장하는 관계적 친밀함입니다.

삯꾼과 선한 목자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삯꾼은 양들이 남의 것이라 여기니 이리가 오면 도망하되 이는 그 양들이 자기 소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자기 지극히 아끼는 것으로 여기시며 그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으십니다. 소유와 관계가 희생의 의지를 결정합니다.

"요한복음 10:16의 '다른 양'은 누구인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다른 양'을 이방인, 즉 유대인의 울타리 밖에 있는 자들로 이해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양떼가 국가의 경계를 넘어 한 목자 아래 한 무리가 될 것을 예고하시며, 이는 사도행전과 바울의 선교 활동을 통해 극적으로 성취된 예언입니다.

예수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하게 얻으려고" (10:10)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풍성한 삶은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깊이와 의미를 가지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도둑이 고갈과 소진을 가져오는 그 자리에, 예수님은 회복을 가져오십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들을 위해 원하신 바로 그 종류의 삶을 가져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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