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위로

감옥 문 앞의 위로: 예레미야 37장과 함께하는 고난

여렐미야가 베냐민 문에서 붙잡혀 고발되며 매를 맞을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침묵하지 않습니다. 고난과 위로가 같은 장 안에 함께 엮여 있습니다.

BibleVibe Editorial읽기 5분
번역본:ESV
예레미야 37:1-20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아들이 되어 고니야를 이어 유다 땅의 임금이 되었으니 이는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는 신하들과 이 땅의 백성도 함께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그러나 시드기야 왕은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보내어 말사한 자로 셀레야의 아들 여후갈과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를 보내며 이르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옵소서` 하더라. 예레미야는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 중에 출입할 수 있었더라.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나왔더니 예루살렘을 에워쳤던 갈대아 군대(들이) 그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 그때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일렁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를 찾아오며 나에게 물으려고 보낸 유다 왕에게 이같이 전하라 `너희를 도우려고 나왔던 바로의 군대가 그 본토 애굽으로 돌아갈 것이요` 갈대아(군대)가 다시 와서 이 성을 치고 취하여 불로 사르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스스로 속여 `갈대아(군대)가 반드시 우리에게서 떠나리라` 하여도 그들이 떠나지 아니하리라. 설혹 너희가 너희를 치는 갈대아의 온 군대를 쳐서 그 장막 중에 부상당한 자만 남아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일어나서 이 성을 불로 사르리라` 하셨더라. 바로의 군대 때문에 갈대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떠날 때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서 나가 베냐민 땅으로 가서 백성 중에서 자기 몫을 받으려 하였더라. 그가 베냐민 문에 이르렀더라 순찰의 아들 하나냐의 아들 셀레야의 아들 이르야라 이름 하는 경위장이 거기 있어 선지자 예레미야를 잡으며 이르되 `너는 갈대아에게로 넘어가려는 자라` 하더라.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그것은 거짓이라 내가 갈대아에게로 넘어가지 아니하노라` 하되 이르야가 듣지 아니하고 예레미야를 잡아 관원들에게로 끌고 가니라. 관원들이 예레미야에게 분히 여기어 때려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옥에 가두었으니 그곳을 옥으로 삼았더라. 예레미야가 웅덩이 곧 지하감옥에 들어갔더니 거기 여러 날을 머물렀더라. 시드기야 왕이 보내어 그를 궁으로 데려오게 하고 그를 은밀히 궁에서 물으니 이르되 `여호와께 받은 말씀이 있느냐`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하고 또 이르되 `왕은 바빌론 왕의 손에 넘겨지리이다` 하고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에게 아뢰되 `내가 왕과 왕의 신하들과 이 백성에게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나를 옥에 가두셨습니까` 또 왕이 왕에게 이르기를 `바빌론 왕이 왕과 이 땅을 치지 아니하리라` 한 왕의 선지자들이 지금 어디 있나이까 나아 군 왕이여 청하옵나니 내 간청을 들으시고 나를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돌려보내지 마옵소서 거기서 내가 죽을까삼려내니이다` 하니라. 시드기야 왕이 명령하여 예레미야를 감옥 뜰에 두고 매일 떡집 거리에서 떡 한 덩이를 그에게 주게 하였으니 성읍 안의 빵이 다 떨어질 때까지였더라. 예레미야가 감옥 뜰에 머물렀더라.

예레미야 37:1–20 (ESV) — 시드기야의 통치, 바로의 군대에 대한 거짓된 소망, 그리고 배신 의심으로 벤야민 문에서 예레미야가 체포된 내용. 본문은 문장 중간("그를 p…에 넣어")에서 끊기며 v. 15에서 서기관 요나단의 집으로 이어진다.

Narration

역사적 배경

예레미야 37장은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긴(고니야)을 유배시킨 뒤 예루살렘에 세운 괴뢰 왕인 시드기야의 통치 초기에서 시작된다. 유다는 불안한 속국 지위에 놓여 있다. 성문 밖에는 외군의 포위, 궁중에는 안위를 갈구하는 자들, 그리고 수십 년간 그 말씀이 환영받지 못한 한 선지자가 있다. 이 장을 지배하는 두 겹의 압력이 있다. 첫째, 정치적 압력이다. 바로의 군대가 애굽에서 북상하여 갈대아인의 예루살렘 포위를 일시적으로 풀어준다. 유다 조정은 이 숨통이 트인 것을 흐름이 바뀐 징조로 해석하며, 시드기야는 심지어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청탁하기 위해 사절(여후할과 스바냐)을 보낸다. 둘째, 영적 압력이다. 예레미야는 이 안도의 시간을 환각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애굽 군대는 본국으로 물러갈 것이며, 갈대아인은 다시 돌아와 이 성을 불태울 것이라는 것이다. 장막 안의 부상병들만으로도 예루살렘에 불을 붙이기에 충분할 것이라고 말한다. 신학적 긴장은 이보다 더 클 수 없다. 예레미야의 입에서 나온 거짓된 위안은, 운명 정해진 성에 그가 줄 수 있는 가장 잔인한 것이다. 이 본문의 후반부는 예레미야 자신의 고난으로 전환된다. 포위가 풀리자, 예레미야는 베냐민에 있는 가족 소유지를 돌보기 위해(아마도 그의 조상 마을인 아나돗의 상속 문제일 것이다) 예루살렘을 떠나려 한다. 베냐민 문—북쪽을 향해 베냐민과 아나돗으로 가는 길이 있는 문—에서 이르야라는 이름의 경비관이 그를 붙잡는다. 그의 가문 명칭은 다윗 왕통의 셀레므야의 아들 하나냐를 통해 왕실 혈통과 연결된다. 이르야는 예레미야를 갈대아인에게로 도망친 자로 몰아붙인다. 예레미야는 부인한다. 이르야는 듣지 않는다. 관리들은 그를 때려 가두어 넣는다. 대조는 너무나 날카롭다. 방금 예루살렘이 불타겠다고 예언한 그 선지자가, 이제는 죄수로서 성벽 안으로 끌려 들어온다. 시드기야가 앞서 보냈던 “오,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위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옵소서”는 요청 자체가 이미 비극적 패턴을 드러낸다. 왕은 선지자의 기도는 원하되 그의 말씀은 원치 않는다. 회개 없는 위안을 원한다. 이것이 고난이 자라나는 토양이다. 영적 지름길을 찾아 헤매는 사회, 진실과 폭력 사이에 끼인 선지자, 그리고 왕이 믿든 믿지 않든 그 말씀은 서 있는 하나님의 존재. 이 장의 이 긴장은 욜리시 멜리스의 카이로(카이로) 스튜디오 5–6에서, 그리고 1979년과 2003년의 키치너(Kitchener) 작업에서 보인, 우상화의 허구성을 폭로하려는 의식과 맞닿아 있다. 우상을 부수는 일, 진실을 말하는 일, 그러한 행위에 따르는 고난을 감수하는 일—이것이 이 본문 전체를 관통하는 신학적 화음이다.

텍스트 안에서 서다

선지자들과 유배 시대에, 다윗의 예루살렘에 있는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심판과 회복의 소망을 겪는 가운데 바빌론의 위협 아래 시련에 직면했다.

구절의 의미

예레미야 37장은 거짓된 안일함과 값 비싼 신실함 사이의 충돌을 연구하는 장이다. 세 가지 신학적 동향이 이 장을 구성한다. 첫째, 거짓된 안일이 드러난다. 바로의 군대가 나타나면 유다의 궁중은 그 순간을 신적 구원으로 읽는다. 예레미야는 잔혹할 정도로 명백하게 그들을 정정한다. "너희는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这里的 히브리어 동사은 "마음을 방황하게 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위험은 단순한 지적 오류가 아니라 마음의 유혹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함으로써 얻는 안위는 안위가 아니라 마취이다. 장을 불태우러 일어나는 부상당한 군인들의 모습은 예레미야의 인상적인 이미지이다. 바벨론 군대의 잔당조차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을 이루기에 충분하다. 인간의 힘이 변수가 아니라 신적 뜻이 변수이다. 둘째, 신실한 중보기도가 자기 방식대로 거절된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우리를 위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고 요청한다. 그 표현은 경건하게 들리지만 그것은 거래적 영성이다. 기도를 올리기만 하고 예언은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예레미야는 후에 이 기도 요청을(37-38장) 존중하겠지만 메시지를 누그러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장은 안위에 이르는 지름길이 없음을 가르친다. 개입해달라고 요청받는 바로 그 하나님이 무시되고 계신다. 회개를 우회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흥정이다. 셋째, 무고한 고난은 설명되지 않지만 버려지지도 않는다. 예레미야의 체포는 이 장의 분기점이다. 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고 있었다. 상속받은 토지를 처리하러 가는 평범한 행위를 하던 중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는 의심만으로 붙잡혀서 구타를 당하고 투옥된다. 본문은 그에게 신정론을 제공하지 않는다. "당신은 신실함 때문에 고난받는 것이며 여기 안위가 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제공하는 것은 더 기이하고 더 견고한 것이다. 하나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예레미야의 구타를 기록하는 같은 장이 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도 기록한다. 고난과 선지자적 사명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묶여 있다. 예레미야 37장의 안위는 감옥의 부재가 아니라 그 안에서의 말씀의 지속이다. 또한 심오한 목회적 흐름이 있다. 시드기야는 37장 후반부와 38장에서 실제로 몰래 예레미야를 찾아온다. 자신의 신하들을 두려워하면서도 선지자의 정직함에 이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장의 패턴은 평탄한 절망이 아니다. 그것은 사명 안으로 흡수된 고난, 참된 말씀과 대조된 거짓 안위, 그리고 선지자를 가두는 왕이 그에게서만 진실을 듣는다는 사실을 서서히 마지못해 인식하는 과정이다.

오늘의 적용

1. 당신의 안위를 점검하라. 바로 그때 도착하여 당신이 이미 바라고 있던 것을 확인해주는 모든 안도감을 파라오의 군대는 은유한다. 물어보라. 이 안위가 회개를 요구하는가, 아니면 단지 편안해지기를 요구하는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위안는 깨달음을 동반하고, 거짓된 위안는 안도감과 다음 일을 직면하기를 조용히 거부하는 것을 동반한다. 2. 말씀을 중심으로 기도의 순서를 바꾸라. 스드기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지 않은 채 하나님께 결과를 구하는 것이 쉽다. 더 정직한 방식은 기도 제목보다 성경이 먼저 agenda를 정하게 하는 것이다. 천천히 읽으라. 그리고 나서 구하라.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가 본을 보인 것이다. 그는 청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언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3. 성문에서 오해가 따르는 것을 예상하라. 예레미야는 주변 문화가 그의 의미를 미리 결정한 까닭에 평범한일을 했다는 이유로 사살되었다. 많은 제자들이 작고 순위적인 행실에 대한 신실함이 두려워하는 공동체에 의해 배신으로 읽혀질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고난은 종종 죄로부터가 아니라, 견디는 방식이 견디지 못하는 방식으로 견딜 만하게 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이 장은 인내를 요청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성문에 그대로 두지 않으셨고, 당신을 오해 안에 그대로 두시지도 않는다. 4. 고난과 사명을 함께 붙들라. 예레미야는 매를 맞고 옥에 갇혔으며, 책의 바로 다음 움직임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학적으로 고난이 부명을 소멸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분명히 한다. 만약 당신이 압박의 계절에 있다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다고 가정하지 말라. 당신은 예레미야가 있었던 바로 그곳, 곧 밴야민 성문에서 손목에 줄이 묶인 채, 입 안에는 여전히 말씀을 품고 있는 바로 그곳에 있을 수 있다. 5. 거래적인 복음주의를 거부하라. 이 장에서 가장 깊은 통례적인 신부적 위험은 포위가 아니라 가시적 요청이다, 즉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라. 그러나 불편한 일은 말하지 말라.' 많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하나님의 임재는 구하면서 하나님의 대립는 불비하려는 것을 원한다. 예레미야 37장은 이 합의가 결국 더 적은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값지게 한다는 것을 경고한다.

되새김

이 장에는 기이한 긍휼이 있으며, 그것은 우리가 보통 구하는 긍휼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이 절들에서 감옥에서 풀려나지 않습니다. 공개적으로 무죄를 입증받지도 못합니다. 그는 더 작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무언가를 받습니다. 말씀의 계속됨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그에게, 그리고 그에 대해 계속 말씀하시는데, 바로 그를 매타하고 성읍 담 안으로 끌고 들어가는 그 한가운데서도 그러합니다. 그것이 예레미야 37장에서 위로의 형태입니다. 위로는 감방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위로는 그 안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위로는 때로는 돌이켜볼 때만 알게 되는 깨달음, 곧 손목의 밧줄이 입술의 부르심을中断하지 않았다는 깨달음입니다. 위로는 성문에서의 오해를 견디고 살아남는 긴 순종입니다. 오늘 당신 자신의 벤야민 미니벤 문에 서 있다면 — 하지도 않은 일로 고발당하고, 한때 존중했던 사람들의 오해를 받으며, 가려 하지 않은 곳으로 끌려가고 있다면 — 이 장은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쉬운 풀려남을 약속하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 받는 바로 그 시간 안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매질을 받으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남아 있는 성함을 드리는 사람, 그리고 진리를 피하려 했던 자신의 마음을 천천히 그리고 마지못해 그 진리를 향해 돌리는 왕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 장은, 우리의 잘려진 발췌에서는, 감옥 한가운데 있는 예레미야와 함께 끝납니다. 나머지 이야기 — 시드기야와의 비밀스러운 만남, 구덩이, 호위 왕위를 나타내는 곳, 성읍의 함락 — 은 여전히 앞으로 남아 있습니다. 위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버텨라. 그 문은 길의 끝이 아닙니다.

자주 묻는 질문

예레미야가 단순히 베냐민으로 가는데도 불구하고 왜 배반자로 고발되었는가?

포위된 예루살렘에서 성문을 통해 나서는 사람은 누구나 바빌론에 투항한 것으로 의심받았다. 경위 이리야는 개인적 적대를 품고 있었을 것이며, 관리들은 오랫동안 예레미야의 설교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므로, 평범한 가족 방문이 반역으로 해석되었다.

파라의 군대가 말해 로마를 정말로 구원했는가?

아니요. 갈대아인들은 단지 이집트의 진격에 대응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물러났을 뿐입니다. 예레미야는 그들이 돌아와서 그 성을 불태울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이것은 정확히 나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레미야 39장; 열왕기하 25장). 그 짧은 안도는 거짓된 위안이었습니다.

시드기야 왕의 기도 요청은 진심이었는가?

부분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예레미야를 두려워하여 그를 몰래 만났습니다(37:17; 38:14). 그러나 그는 예언 없는 기도를 원했습니다 — 회개 없이 위안만을 추구하는 거래적인 영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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