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위로

위로가 부재할 때: 예레미야 6장에서 신앙과 함께 고난을 겪다

고통은 신앙의 반대편이 아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 신앙이 참된 형상을 갖추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예루살렘 성문 앞에서 울부짖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통찰은, 보이지 않지만 고통 안에서도 여전히 실재하는 위안을 드러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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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ESV
예레미야 6:1-20

벗어나라, 베냐민의 백성이여, 예루살렘 가운데에서 피난처로! 데koa에서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에 신호기를 세우라! 이는 북쪽에서 재앙이 임하며, 큰 파멸이 이르기 때문이라. 아리운 시온이여,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그녀이여, 내가 멸하리라. 그를 치며 목자들이 양 떼를 몰고 와서, 사방에 장막을 치고, 각기 자기의 맡은 양 떼를 먹이리라. (시 95:7과 같이) 그를 치기 위해 준비하라: "일어나라, 대낮에 우리가 치리라." "화 있을진저! 날이 기울어 저녁 그림자가 길어졌도다." "일어나라, 밤에 우리가 공격하여 그의 요새를 무너뜨리자." 만군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의 나무들을 찍어내리고, 예루살렘을 향해 공성 언덕을 쌓으라. 그는 형벌 받을 성읍이라. 그 가운데에는 오직 사기만 있도다. 샘이 물을 흘리듯이 그가 악을 흘러나오게 하니, 그 안에서 폭력과 강탈이 들리며, 내 앞에서 항상 질병과 상처가 있도다. 예루살렘이여, 경계를 받으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를 미워하여, 너로 황무지가 되게 하고,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땅으로 만들리라. 만군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포도나무에서처럼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너희가 끝없이 남을 거두게 하라. 그 가지를 덮으며 포도 수확자처럼 다시 손을 뻗으라.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경고하여 듣게 하리요? 그들의 귀가 막혀 들을 수 없도다. 보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욕되는 것이 되었으니, 그것을 받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진노로 충만하여 견딜 수 없도다. 그것을 거리의 어린 아이와 함께 모인 청년 무리 위에 부으라! 과연 남녀가 함께 사로잡히며, 장로와 나이 많은 자도 그리하리라. 그들의 집은 다른 자에게로, 밭과 아내도 함께 넘어가리라. 이는 내가 땅의 거민을 향하여 내 손을 펴리라 - 여호와의 선언이니라.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이익을 탐하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다같이 거짓을 행하도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치유를 제공하며, "다 잘 되었고, 다 잘 되었다"고 말하니, 실상은 잘 된 것이 없도다. 그들이 수치스럽게 행하였으며,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나,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며, 얼굴이 붉어지지도 아니하도다. 반드시 그들이 넘어지는 자 중에 넘어지리라, 내가 그들을 벌하는 때에 걸려 넘어지리라 - 하나님이 말씀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길가에 서서 살피고, 옛 길을 물어보라. 어느 길이 복된 길이냐? 그것으로 행하여 너희를 위한 안식을 찾으라.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아니 하리라" 하였도다. 내가 너희를 위해 파수꾼을 세웠으나, "나팔 소리를 들으라!" 하였더니,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아니 듣겠노라" 하였도다. 열방이여, 잘 들으며, 회중이여, 그들의 앞으로 올 일을 알라.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가져오리니, 이는 자기들의 꾀의 결과이니라. 이는 그들이 내 말을 듣기를 거절하며, 내 교훈을 버렸음이니라. 스바에서 오는 유향이나 먼 땅에서 오는 향기로운 갈대가 내게 무엇이 필요하리요? 너의 번제물은 받을 만하지 않으며, 너의 제물은 내게 기쁘지 아니하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이 백성 앞에 넘어지게 하는 것들을 두리니, 그들이 그것에 걸려 넘어지리니, 부모와 자식이 함께 넘어지며, 이웃과 벗이 함께 망하리라.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보라, 북방 땅에서 한 백성이 오며, 땅의 끝에서 큰 나라가 일어났도다. 그들이 활과 투창을 잡았으니, 잔인하여 긍휼을 모르며, 그들의 소리는 바다의 부르짖음과 같도다. 그들이 말을 타고, 아리운 시온이여, 너를 향해 싸울 사람처럼 갖추었도다! "우리가 그들의 소식을 들었더니, 우리의 손이 늘어졌으며, 산고가 우리를 잡았으니, 해산하는 여인의 고통과 같도다. 들판으로 나가지 말며, 길을 걸지 말라! 이는 대적의 칼이 거기 있으며, 사방에 두려움이 있음이니라." 내 가난한 백성이여, 굵은 베옷을 입고 너희 위에 티끌을 뿌리라! 독자처럼 슬퍼하며, 통곡하라. 이는 갑자기 멸하는 자가 우리에게 임함이니라. 내가 너를 내 백성의 시험관장이요, 정련자가 되게 하였으니, 너는 그들의 행위를 살피고 시험하라. 그들은 구리와 철이니, 모두 완고하게 거역하며, 비루하게 행하고, 모두가 부패하게 행하도라. 풀무가 불어 쉬고, 납이 불에 소멸되었도다. 그러나 제련자가 공연히 제련하니, 찌꺼기가 분리되지 아니하도라. 그들이 "버림받은 은"이라 불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셨음이니라.

예레미야 6:1–20은 재난이 북방으로부터 가시적으로 다가오는 가운데 선포된 지속적 경고이다. 본문은 도망치라는 권면(1–3절)에서부터 하나님ご自身の 예루살렘에 대한 결의(4–8절), 백성의 듣기를 거절함(9–13절), 상처가 곪는 동안 '다 잘된다'고 외치는 자들의 거짓된 평안(14–20절)로 나아간다. 8절에서 '위로' 혹은 '꾸짖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원어 תּוֹכֵחַ(tochachah)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곧, 하나님의 꾸짖음 자체가 돌봄의 한 형태인데, 이는 하나님이 아직 그 백성을 버리시지 않았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Narration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배경

예레미야의 예언 사역은 요시야 왕 십삼년, 즉 기원전 약 626년에 시작되었으며(렘 1:2), 6장은 예루살렘이 기원전 586년에 첫 번째로 함락되기 전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북방에서 오는 재앙'은 막연한 비유가 아니다. 그것은 느부갓네살의 지휘 아래 바벨론 군대인데, 마침내 예루살렘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첫 번째 성전을 불태우며, 도시의 지도적 시민들을 포로로 끌고 갈 것이다. 데koa(1절)는 아모스의 작은 고향으로, 베들레헴 남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눈에 잘 띄는 산마루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벤학렘('포도원의 집')은 베들레헴과 예루살렘 사이의 언덕에 있는 라맛 라헬과 동일시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데, 망을 보는 망대 역할을 할 만큼 충분히 높은 곳이다. 예레미야의 지시는 구체적이다. 북방 침략자의 가시선 너머로 남쪽으로 도피하라. '그의 주위에 장막을 치는 목자들'(3:4절)은 문자 그대로의 베두인 사람이 아니라, 사마리아에 대한 오래된 심판 예언에서 가져온 의도적인 이미지이다(미 5:5절 참조). 목회적 언어가 무기화되고 있다. 무리를 먹여야 할 지도자들이 이제 도살을 위해 그 에포를 포위하고 있다. 6절 — '그 심 벌정을 당하기로 정해진 성읍이니, 그 가운데 오직 사기만이 발견된다' — 는 신약 언약을 활성화하는 죄들 중에서 사기와 압제가 열거되어 있는 신명기 28장의 언약 언어를 반영한다. 예레미야가 이 장을 끝낼 무렵, 그는 모든 계층 — 가장 낮은 자부터 가장 높은 자까지, 에제 priest와 선지자도 마찬가지로 — 가 탐욕에 사로잡힌 사회를 묘사하고 있다(13절). 14절의 유명한 구절,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에 대하여 경솔하게 치유를 제공하며, 만사형통이라, 만사형통이라 하나, 아무것도 형통하지 않으니' 는 후에 바울의 고백 —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출산의 고통으로 함께 탄식하고 있다' (롬 8:22절) — 로 자라난 텍스트의 씨앗이다. 이것은 또한 디트리히 본회퍼가 1930년대 독일 교회들의 '싼 은혜'를 반성하며 인용한 구절이기도 하다. 이 병행성을 아래에서 신중히 다루고자 한다.

시공(時空) 안에서의 부르심

첫 성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묵상은 다윗의 고향 예루살렘을 지나 디아스포라와 시골 풍경까지 이어지며, 그곳에서 고대 신실함이 고난을 통해 시험받았다.

텍스트이 그 자신의 음성으로

예레미야 6장은 다섯 겹의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도피하라는 부름(1–3절); (2) 만군의 여호와께서 포위전을 알리심(4–8절); (3) 남은 자와 포도 따는 자(9–11절); (4) 말의 실패와 진노의 넘침(12–15절); (5) 거부받은 말씀과 열매 없는 예배(16–20절). 8절의 히브리어 동사 לָמָּה תוֹכִיחִי(lammah tokhichi)은 놀랍다. 하나님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미워하기 전에 나로 너를 책망하게 하라.' 동일한 어근(yakhach)이 레위기 19장 17절에 등장한다. 거기서 이스라엘은 명령받는다, '너는 반드시 네 이웃을 책망할지니라(הוֹכֵחַ תּוֹכִיחַ).' 책망은 거부가 아니다. 그것은 이웃이 위험에 처했을 때 사랑이 취하는 형태이다. 신적 책망 그 자체가 위로의 표지이다. 그것은 아직 돌아서지 않은 자의 음성이다. 16절은 히브리 선지자들 위대한 초대의 하나이다: '곧은 길에 서서 살피라. 옛길, 곧 좋은 길이 어디인지 물어보고, 그리로 행하라.' 그러나 백성은 대답한다, '우리는 그리로 행하지 않겠노라.' 예레미야의 비극은 하나님이 침묵하시는데 있지 않다. 신적 언어가 '수치의 대상(חֶרְפָּה, cherpah, 10절)'이 되었다는 데 있다. 말씀이 수치로 취급될 때, 남은 유일한 처방은 심판이다. 19–20절은 서정적인 예전적 교환으로 끝난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스바에서 온 유향이나 먼 나라의 단 향초가 내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의 번제는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고, 너의 제물은 내게 열납되지 아니하느니라.' 듣지 않는 의식은 위로가 아니다. 그것은 모욕이다. 귀가 먹은 백성의 예배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더 깊은 상처가 된다.

오늘의 본문으로 살다

1. 견책을 위로로 받으라. 신실한 친구, 목회자, 혹은 너의 양심이 너에게 어려운 진실을 직면하게 할 때, 그 목소리 자체가 긍휼다. 네가 정죄받고 있다고 단정하기 전에, 누군가가 실제로 너를 해로부터 지키려 하고 있는지 물어보라. 이것이 도카하(회개 촉구) 원리다: 하나님의 '아니오'는 종종 그의 돌봄의 가장 친밀한 형태다. 2. 값싼 '모든 것이 well이다'를 거부하라. 가정에서,教会에서, 공적인 삶에서, 우리는 예레미야가 이름 붙인 거짓 치유자들 —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 평화'라고 말하는 목소리들 — 에 둘러싸여 있다. 실제 상처의 이름을 부르는 법을 배워라. 이름 부르기가 진정한 치유를 향한 첫 번째 단계다. 3. 오래된 길을 걸어라. 16절의 초대는 향수가 아니라 지혜다. '좋은 길' — 언약의 삶, 안식일의 안식, 긍휼, 성문에서의 정의라는 검증된 패턴이 있다. 우리가 사모하는 위안은 새로운 길을 발명함으로써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걸었고 우리의 구세주가 몸소 구현한 길들로 돌아감으로써 발견된다. 4. 네 귀가 닫히고 싶을 때에도 계속 경청하라. 예레미야의 가장 어려운 문장은 '그들의 귀가 막혀서 들을 수 없다'(10절)이다. 우리 모두는 영적 무감각의 시기에 이른다. 그 치료법은 더 큰 설교가 아니라 조용한 실천이다: 다시 시작한 기도, 재개한 금식, 한 편의 시편을 급하지 않게 읽는 것. 귀는 천천히 막힘이 풀린다. 5. 남은 자들을 위해 인내하라. 9절은 하나님이 여전히 '이삭을 줍겠다' — 최악 이후에도 거두어들일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것을 약속하신다. 너의 고난 가운데서, 모든 것이 잃었다고 단정하지 말라. 포도 수확의 주인은 또한 남은 송이를 돌보시는 분이시다.

되새김

어떤 고난은 소리를 내게 만들고, 어떤 고난은 침묵하게 만듭니다. 예레미야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안고 있습니다. 그는 거리에서 외치고(11절), 그리고 나서 그의 고백 가운데서 우리가 기억하는 울음의 선지자가 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악의 문제에 관한 논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을 돌려받지 못하는 도시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부서진 목소리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고난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면, 위안이 거두어졌다고 믿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렘미야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가장 부재해 보이실 때 바로 그때 가장 임하시는 것이라는 긴 논증입니다. 그는 벧학게렘에 신호를 세워서 어떤 사람들이 보고 도망할 수 있게 하십니다. 그분 자신이 경고의 말하는 이가 되시는데, 그 경고가 순종하면 구원이 됩니다. 그는 남은 자를 보존하십니다 — 추수하는 자 뒤의 이삭 줍는 자들, 포도 따는 자 뒤의 흩어진 송이들과 같이. 우리가 찾는 위안은 언제나 시험의 제거는 아닙니다. 그것은 때로, 시험 한가운데서, 누군가가 내내 말씀하고 있었다는 발견입니다 — 우리가 들었다고 생각한 온계는 그의 물러남이 아니라 우리의 귀먹음이었습니다. 위촉자는 성령이시며(요한복음 14:26), 성령은 예레미야가 사용한 바로 그 방법을 통해 일하십니다: 말해진 말씀, 신실한 경고, 예배를 위해 모인 공동체, 떼어지고 나눠진 떡. 그러니: 작은 음성들의 날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사랑 안에서 받은 책망의 날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예루살렘처럼, 다시 듣기를 배워야 하는 날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갈림길에 서라' 라고 말씀하신 주님은, 수 세기 후, 로마의 길 위에 서서 눈 먼 박해자에게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라고 물으신 바로 그 주님이십니다. 그는 여전히 물으십니다. 그는 여전히 선한 길을 가리키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 바로 여기에서도 — 그의 음성 자체가 바로 여러분이 찾아왔던 위안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사랑하신다면, 어찌하여 이토록 무시무시한 심판을 내리시는가?

예레미야 6장의 심판은 그 자체로 사랑의 마지막 제안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너를 견책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를 미워하리라"(8절)라고 말씀하실 때, 그는 성문 앞에 이른 군대 앞에서 마지막 호소를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적 견책(토카하)은 그 자체로 위안이며, 하나님이 아직 그의 백성을 버리시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진정한 위험은 하나님께 견책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평화, 평화'라는 거짓된 위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이것은 현대 교회에 가장 필요한 경고 중 하나입니다. 문화나 가족, 혹은 우리 자신의 내면의 대화가 상처를 가릴 때, '평안하라, 평안하라'는 외침은 영적 마취제가 됩니다. 참된 위로는 고통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데려가 그분과 마주하게 하시고, 그의 영으로 치유되게 합니다.

큰 고통 속에서 '남은 자'라는 개념이 어떤 소망을 제공하는가?

예레미야 6:9는 심지어 거두는 자가 지나간 후에도 하나님이 마치 포도 따는 자처럼 그 가지들 위에 다시 한 번 그분의 손을 지나게 하셔서 남은 것을 찾아내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징벌은 엄중하지만 그분의 긍휼이 전멸시키지는 않습니다 — 어떤 이들은 항상 남겨지고, 거두어지고, 기억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는 남은 자들이 그 안에 닻을 드리는 거룩한 씨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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