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신뢰

말씀은 가까이 있다: 믿음과 신뢰의 부르심

로마서 10장은 믿음이 멀리서 올라가야 할 산이 아니라 가까이서 응답하는 것임을 드러냅니다 — 입으로 고백하며 마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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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ESV
로마서 10:1-20

형제들아, 내 마음의 소원과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그들을 위한 것이니, 곧 그들이 구원받게 되기를 바라노라. 내가 그들에게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으나,知识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쓰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율법의 목적은 그리스도이니, 이는 믿는 모든 자에게 의를 이루게 하심이라.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의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살리라 하였으나, 믿음의 의는 이같이 말하느니라,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리요 하지 말라, (이는 그리스도를 끌어내리자는 것이요), 또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리요 하지 말라, (이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끌어올리자는 것이니라).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니라.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으로 믿으면, 너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성경이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고,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동일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시며, 자기를 부르 는 모든 자에게 부유하시니, 이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함이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믿지 못하는 자를 어떻게 부르며, 듣지도 못한 자를 어떻게 믿으며, 전하는 자가 없으면 어떻게 들으며,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면 어떻게 전하리요. 기록된 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어찌 아름다워야 할꼬 한 것과 같으니라.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에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 전도를 믿은 자가 누구냐 하였으니, 이는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음이라. 그런즉 내가 이르노니 그들이 듣지 못하였느냐? 결코 아니라,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또 이르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너희를 질투나게 하려 아니하여 이방 백성으로, 미련한 백성으로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이사야는 크게 담력 있어 이르되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이 나를 찾았으며, 나를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내가 나타났느니라 하였고, 이스라엘을 가리켜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스리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토록 내 손을 펼쳤느니라 하셨느니라.

로마서 10:8-10은 이 본문의 신학적 핵심입니다: "말씀이 네 가까이 있어 네 입과 네 마음에 있다." 바울은 신명기 30:14과 이사야 28:16을 모아 구원을 접근 가능하면서도 내면적인 것으로 규정합니다. 순서를 주목하십시오 — 먼저 마음(의를 위함), 그 다음 입(구원을 위함). 믿음은 안에서 일어나 고백으로 밖으로 나아갑니다.

상황: 이스라엘을 위한 바울의 슬픔

바울은 AD 56년경, 세 번째 선교 여행의 끝 무렵인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기록한다. 로마서 9–11장은 한 가지 질문, 곧 "하나님이 Israel에 실패하셨는가?"를 다룬 지속적이며 신학적이며 목회적인 논증이다. 10장에서 바울은 신적 주권(9장)으로부터 인간의 책임으로 전환한다. 그는 고통으로 문을 연다. "내 마음의 바람과 하나님께 드리는 간구는 그들을 위한 것, 곧 그들이 구원받게 함이라." 그는 또한 고린도전서 9:20-22에서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되어 유대인을 얻고자 하였다"고 말한 바로 그 사도이며, 로마서 9:1-3과 같이 그들이 "지식에 합당한" 열심이 아닌 열심을 가지고 있음을 증언한다. 그들이 추구한 열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를 세우는" 것이었다(3절). 바울은 대조점을 설정하기 위해 모세의 말씀(레위기 18:5 —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인하여 살리라")을 인용한다. 율법의 길은 행위를 요구한다;믿음의 길은 받는다. 그런 다음 그는 신학적으로 재해석하여 신명기 30:12-14를 인용한다. "누가 하늘로 올라가겠느냐?"는 더 이상 사변적 질문이 아니다 — 그것은 성육신으로 응답되었다. "누가 무저갯으로 내려가겠느냐?"는 더 이상 열려 있지 않다 —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다. 말씀이 가까이 왔다. 시대는 초대교회와 복음의 선교적 확장이다; 지리적으로는 바울의 논거가 이스라엘 자신의 성경에 뿌리를 둔 예루살렘에서부터 바울의 선교터인 로마까지 뻗어 있다. 15절의 "보내는" 동기는 실제 사도적 여정 — 예루살렘에서 일리리쿰(롬 15:19)을 지나 스페인까지 향하는 것 — 을 반영한다. 요세푸스는 Antiquities 18권에서 바울이 들어간 디아스포라 회당 네트워크를 묘사하는데, 모든 주요 도시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 나중에 밟을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 전체 장은 한 고조로 구축된다. "듣지도 못한 자를 누가 믿겠느냐?" 듣는 것은 전파자를 요구한다;전파자는 보내심을 요구한다. 이스라엘은 들었다 — 소리가 나갔다(시편 19:4; 18절) — 그러나 "모든 사람이 순종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믿음은 설교를 통해 주어진 선물이자 받기에 대한 인간의 책임으로 남는다.

시공간: 전령들의 발자국

초대교회 시대, 바울의 선교 서신이 기록되던 시기에 배경하며, 다윗의 유산을 간직한 예루살렘에서부터 바울의 회중들이 믿음과 신뢰, 그리고 이방인의 포용에 대해 사투를 벌였던 제국의 수도 로마에 이르기까지에 걸친다.

의미: 신앙의 명령

로마서 10장은 이천 년 동안 기독교 신학을 형성해 온 분명한 순서를 제시합니다. (1) 보내심, (2) 전파, (3) 들음, (4) 믿음, (5) 고백, (6) 구원. 9-10절에는 두 가지 신학적 기둥이 있습니다. 첫째, 믿음의 대상은 모호한 것이 아니라 교리적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은 복음에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복음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의 도구는 twofold입니다—마음과 입. 믿음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それは「의롭게 하기에 이르는 믿음」으로, 확신에서 고백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12절에서 그 제의를 보편화합니다.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분별이 없나니 이는 같은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심이라.” 이 “분별이 없음”은 이방인 선교를 움직이는 신학적 원동력입니다. “부르짖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칼레오는 풍성한 의미를 지닙니다. 바울이 명시적으로 인용하는 Joel 2:32의 칠십인역에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로 나타납니다. 주를 부르는 것은 그를 간구하며, 신뢰하며, 그에게 피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의 나머지 부분은 이러한 신학을 선교 신학으로 전환합니다. 이 사슬은 어느 지점에서도 끊어질 수 없습니다. 보내는 이가 없으면 선포자가 없습니다. 선포자가 없으면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듣는 사람이 없으면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장 끝에서 장 10장 안에서 완전히 답하지 않는 엄숙한 질문—“이스라엘이 듣지 아니하였는가?”—로 마무리하며, 11:1에서 다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내버리지 아니하셨다”는 극적인 선언과 함께 이 문제로 돌아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의미는 믿음이 동시에 선물이요 추구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 가까이 심겨진 말씀과 그 말씀을 받아들이도록 준비된 마음에서 싹틉납니다.

적용: 오늘날 믿고 선포함

로마서 10장을 어떻게 삶으로 실천할 것인가? 첫째, 온전한 자기 자신 — 마음과 입으로 — 믿는 것이다. 고백 없는 사적 확신은 영혼을 굶기고, 내면의 믿음 없는 공적 고백은 우리를 다시 바리새인으로 만든다. 둘째, 말씀을 가까이 있는 것으로 받으라. 우리 모두 믿음을 험난한 오르막으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 "누가 올라가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이 우리에게 이미 왔다고 강조한다. 우리의 과제는 영웅적 경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까이 심겨진 말씀에 응답하는 것이다. 셋째, 믿음이 거의 사적이지 않음을 인식하라. 바울은 묻는다, "듣지 못한 그들이 어떻게 믿겠는가?" 당신의 믿음은 누군가의 설교의 열매이다 — 부모의 기도, 친구의 초대, 우연히 들은 설교문, 받은 전도지, 선물받은 성경. 이것은 당신을 빚진 자로 만든다(로마서 1:14절 참조). 보내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전파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열린 귀를 위해 기도하라. 넷째, 보편성("만유의 주")과 특별성("누구든지 부르는 자")를 함께 붙들라. 제안은 넓고, 수용은 개인적이다. 지체하지 말라. "말씀이 네게 가까이 있어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때 담대히 그리하라. 바울은 고백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두운 방에서, 적대적인 직장에서, 의심이 드는 순간에 그리스도를 부르는 그 입은 이사야의 예언 성취에 참여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사치가 아니라 전할 가치가 있는 복음에 대한 적절한 응답이다.

되새김

�시 로마서 10장을 붙잡아 봅시다. 바울의 질문 — "주여, 누가 우리의 전도를 믿었는고?" (이사야 53:1) — 는 이사야의 슬픔이면서 또한 바울의 슬픔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슬픔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든, 가르치든, 자녀를 양육하든, 혹은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든, 우리는 자주 귀먹은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 말들을 던져 넣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를 보내신 바로 그 하나님이 또한 바울을 보내셨고, 우리도 보내십니다. 그는 자신을 그 수단에 묶으십니다 — 전도의 어리석음, 인간 입술의 연약함, 회의실과 거실의 평범함 — 그리하여 놀라운 일을 이루시기 위함이요, 곧 인간의 마음에 일어나는 믿음이 그 일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이름을 올려놓으십시오 — 당신이 믿음으로 오기를 원하는 한 사람을.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분께서 당신의 입과 당신의 삶을 그 가까이 계신 말씀의 그릇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구하십시오.

자주 묻는 질문

어느 것이 먼저인가 — 마음으로 믿는 것인가, 입으로 시인하는 것인가 — 그리고 왜 그것이 중요한가?

바울은 그들에게 명하되: 먼저 마음으로 믿는 것(의로움에 이르는 것이요), 다음으로 입으로 시인하는 것(구원에 이르는 것이라)이라 명령하노라. 믿음은 사적인 마음의 사건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전 사람의 운동이라. 마음만으로는 숨을 수 있으며, 입만으로는 비어 있을 수 있나니, 참된 믿음은 이 둘 다라 — 시인하는 믿음이니라.

'그들이 전하는 자 없이 어떻게 들으리이까?' —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사도 바울의 로마서에서 본 그 사슬(보냄 → 전파 → 들음 → 믿음 → 구원)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모두 해외에 나갈 수는 없지만, 우리는 모두 '보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 선교사를 위해 기도하고, 재정적으로 돕고, 단기 선교팀을 후원하며, 현지에서 충실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받을 뿐만 아니라 전하는 것도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에 분별이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특별한 위치를 없애는 것인가?

아니다.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다"고 강조한다.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접근의 평등(같은 주, 같은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지, 이스라엘의 역사적 역할의 무효화를 뜻하지 않는다. 믿음의 길은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으며, 이는 이스라엘의 제사장적 사명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하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 — 오늘날 '듣기'는 어떤 형태를 취하는가?

원래 '듣다'는 것은 구전 선포였습니다. 오늘날 그것은 성경 읽기, 팟캐스트, 찬양, 심지어 대화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원칙은 여전히 같습니다: 신앙은 이해 가능한 말의 전달자를 필요로 합니다. 개인적 성경 읽기는 성령이 내면적으로 그 텍스트를 밝혀 주실 때 '듣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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