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과 부르심

이름이 다시 쓰일 때: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방향의 회복

아브라함이 구십아홉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새로운 계획을 주셨던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정체성을 주셨다. 정체성이야말로 방향이 자라나는 토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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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ESV
창세기 17:1-20

아브람이 구십구 세 되었을 때에 여호와가 아브람에게 나타나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엘 샤다이이니 나를 앞서 행하며 온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너와 세우고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 하나님이 또 그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내 언약을 너와 세우나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 네 이름을 다시는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라 이는 내가 너로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 내가 너로 심히 생육이 번성하게 하고 너로 민족이 되게 하리니 열방이 너에게서 나오며 왕들이 너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너와 너의 후손의 대대로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 너와 너의 후손에게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너의 후손이 거하는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너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와 너의 후손이 대대로 내 언약을 지키라 너와 너의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은 이러하니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을지니 너희 양피의 고기를 할례하라 이것이 나와 너와 너의 후손 사이에 지키는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 후손 중 태어난 자나 혹시 이방인에게서 돈 주고 사온 자든지 너희 생긴 자나 돈 주고 사온 자를 다 할례하라 너의 집에서 난 자나 돈 주고 사온 자를 다 할례하라 그러하면 너희 언약이 내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너희 중에 남자라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 곧 그 양피의 고기를 할례하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파하였느니라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를 일컬어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리라 내가 그를 축복하여 그로 네 아들을 낳게 하고 내가 그를 축복하리니 그가 민족의 어미가 될 것이요 열방의 왕들이 그에게서 나오리라 아브라함이 얼굴을 땅에 대고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 수 있으랴 사라가 구십 세에 어찌 생산하리라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 당신 앞에서 살기를 바라나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과연 네 아내 사라가 너에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가 영원한 언약이 되어 그의 후손에게 이르리라 이스마엘에 대하여는 내가 네 말을 들었나니 내가 그를 크게 복을 주고 그로 생육이 번성하게 하며 그로 열두 방백의 아비가 되게 하고 내가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그러나 내 언약은 내가明年 이삭과 세우리니 사라가 내년 이 때에 너에게 낳으리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그에게서 떠나시니라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종과 돈 주고 사온 모든 남자를 데려오자 곧 아브라함의 집 모든 남자가 그 날에 이르러 양피의 고기를 할례 받았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라 아브라함이 그 양피의 고기를 할례 받던 때에 나이 구십구 세이었고 그 아들 이스마엘은 십삼 세에 할례를 받았으니 그 날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이 할례를 받았고 그의 집 모든 사람 곧 집에서 태어난 자와 돈 주고 이방인에게서 사온 자도 다 그와 함께 할례를 받았더라

창세기 17장은 소명에 관한 이야기의 중심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고('나는 엘 샤다이이다'), 그다음에 요구하시는 걸음걸음에 대해 말씀하시며('내 앞에서 행하며 완전하라'), 그 후에 세우실 언약을 말씀하십니다. 두 번의 이름 변경이 이 장을 감싸고 있습니다 —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 이것은 소명이 단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되는 것임을 시각적으로 보여줍니다.

Narration

역사적 및 지리적 배경

창세기 17장은 아브람의 생의 황혼기에 펼쳐진다. 그는 아흔아홉 살이며, 사라 역시 아흔 살이다(창 17:17). 배경은 가나안 땅으로, 하란을 떠난 이래로 나그네로서 그가 종횡무진 걸어 다녀온 지역이다(창 12:5). 이 장은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이 태어난 지 열세 해 뒤에 도래한다(창 16). 그 기간 동안 아브람은 충분히 이스마엘이 하나님이 앞서 주신 약속의 성취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 굳어진 가정 속으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며 끼어드신다: '나는 엘 샤다이이다.' 언약이 다시 확립되고, 심화되며, 이제 육적(肉的) 표지 곧 할례가 주어진다. 이것은 정체성을 순종에, 순종을 소속감에 묶어 둔다. 지리적으로 이 장은 가나안의 고지대와 중앙 산마루에 속하며, 후에 세겜, 헤브론, 벧엘과 연관되는 지역, 곧 족장들의 핵심 영역에 해당한다. 신학적으로 이 장은 구약에서 가장 집중된 소명 재정의 순간들 가운데 하나이다: 한 남자의 이름이 바뀌고, 그의 아내의 이름이 바뀌며, 그의 가문의 미래가 하나의 스캔들이 자만한 약속, 곧 사라 자신이 그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중심으로 다시 그려진다.

시와 공간 속의 좌표

첫 성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묵상은 창세기 17장의 장면으로, 목적과 정체성의 언약이 세워진 세겜과 헤브론의 족장적 풍경 속에서 펼쳐집니다.

본문의 의미와 해석

창세기 17장은 하나님의 삼중 계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모두 아브람의 소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형성한다. 첫째,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신다: '나는 엘 샤다이이다.' 히브리 사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을 아는 것이다. 엘 샬다이 — '전능하신 하나님' 혹은 '산의 하나님/젖의 하나님' — 은 아브람의 상황, 그의 나이나 그의 아내의 불임을 포함하여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그 자원이 제한되지 않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본문은 소명이 우리의 능력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충분하심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하나님께서 두 가지 명령을 내리신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며 완전하라.' 이것은 소명의 윤리적 형상이다. 약속은 무조건적이지만, 그 행함은 응답적이다. 부름받은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함으로 표시되는 특정한 삶의 방식으로召唤받는 것이다. 언약은 선물이며, 완전한 행함은 관계의 인간적 측면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두 가지 보이는 표적으로 언약을 다시 표시하신다: 아브람과 사라의 개명, 그리고 할례의 제정. 고대 세계에서 개명은 주권적 행위였다 — 파라오는 외국 관리를 개명했고, 정복자는 도시를 개명했다. 하나님께서 개명하실 때, 그는 소유권을 주장하시고 운명을 재지향하신다. '아브람'( '높임 받은 아버지')은 '아브라함'( '많은 자의 아버지')이 된다. '사라'( '내 공주', 논쟁적)는 '사라'( '공주', 보편적)가 된다. 이 부부는 더 이상 사적인 개인이 아니다; 그들은 이제 오는 민족들의 원형이 되었다. 신학적 의미: 창세기 17장의 소명은 직업, 재능의 혼합, 혹은 자기 발견 프로젝트가 아니다. 그것은 언약적 개명이다. 삶의 방향은 하나님께서 그 삶이 누구라고 선언하셨는가로부터 흘러나온다. 정체성이 활동에 앞선다; 존재가 행위에 앞선다. 아브라함의 '목적'은 그가 찾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엘 샤다이께서 그 위에 말씀하시고 그의 가정의 살 안에서 인치된 것이다.

오늘의 적용

텍스트로부터 세 가지 적용 사항이 도출된다. 1) 자기 방향을 전략적으로 설계하기 전에 먼저 자기 계시를 받으라. 아브라함은 이 장을 계획하면서 시작하지 않는다. 그에게 먼저 말씀이 임한다. '나는 엘 샤다이이다'는 하나님에 관한 명제가 아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확신의 근원을 재정의하도록 이끄는 초대이다. '나는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고 묻기 전에,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계시하셨는가?'라고 먼저 물을 것을 요구한다. 우리의 방향은 우리가 따르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에 따라 그 건전함이 결정된다. 2) 정체성은 스스로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선포된 것으로 삼아라. 현대 문화는 소명을 스스로 작성하는 프로젝트로 여기한다. 자신의 강점을 발견하고, 자신의 영역을 브랜딩하며, 자신의 은사를 최적화하라고 한다. 그러나 창세기 17장은 이것을 뒤집는다. 아브라함은 스스로의 이름을 바꾸지 않는다. 그의 이름은 하나님에 의해 바뀌어진다. 성경의 문법에서 소명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위에 선언하시는 것이며, 공동체와 순종을 통해 확인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 내려는 시도를 멈추고, 당신을 부르시는 음성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라. 3) 흠 없는 걸음은 소명의 장애물이 아니라 소명의 형상이다. '내 도를 행하며 너는 완전하라'는 말씀은 종종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입장표로 오독된다. 그러나 맥락 안에서 이것은 언약의 열매이다. 우리가 불리는 받기 위해 흠 없이 걷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불림 받았기에 흠 없이 걷는 것이다. 오늘날 신자에게 이것은 일상 속에서 정직함, 투명함, 충성으로 살아가는 소명으로 번역된다. 할례라는 언약의 표식 — 값비싸고, 육체적이며, 가시적인 것은 — 새 Testamento 소명의 형상에 대한 그림자를 제공한다. 즉, 그것은 마음의 사적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몸과 습관과 가시적인 일상 속에서 표지된 삶을 가리킨다. 요컨대, 방향은 선언에서 흘러나온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라고 묻기를 멈추고, '하나님이 나를 어떤 존재로 말씀하셨는가?'라고 물으라. 그리고 그에 맞게 행하라.

되새김

창세기 17장에는 조용한 코미디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17:3). 그러고는 웃음을 터뜨립니다(17:17). 하나님은 어느 쪽도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 순간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엎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측정 가능한 기준으로 그 약속은 터무니없기 때문에 웃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흔아홉 살 남자와 아흔 살 여자가 아들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은 웃음으로 끝나지 않고 언약으로 끝납니다. 아마도 당신의 사명에 대한 느낌에도 같은 이중적 움직임 — 엎드림과 웃음 — 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약속은 짊어지기엔 너무 무겁게 느껴졌고, 믿기엔 너무 불가능하게 느껴졌습니다. 창세기 17장은 두 반응 모두 허락된다고 말합니다. 허락되지 않는 것은 떠나가는 것입니다. 별들을 이름을 붙이신 하나님(창 15:5), 엘 샤다이가 당신에게 이름을 붙여주신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에게 이름을 붙여주셨다면, 날과 자손과 땅도 세려 놓으셨습니다. 오늘 당신의 몫은 미래를 계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몫은 현재를 흠 없이 걸어가는 것이며, 당신의 몸에 당신이 그분께 속해 있다는 표를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방향은 저절로 잡힐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구십아홉 살일 때 왜 언약을 다시 확인하십니까?

때가 이미 신학적이다: 모든 인간적 가능성이 소진되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이 마침내 그 실재를 드러낸다. 아브라함의 방향은 더 이상 그의 나이나 생물학적 조건에 근거하지 않고, 오로지 엘 샤다이(El Shaddai)의 충분하심에만 근거한다.

성경에서 이름의 변경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름의 변경은 소유권과 정체성의 이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람과 사라의 이름을 바꾸실 때, 그들을 그들의 개인적인 역사 속에서 꺼내어 더 크고 다국적인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할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의 조건입니까?

창세기 17장에서 할례는 언약의 표(이고 인)이지, 그 근원이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서 4장 11절에서 그것을 이미 존재하던 믿음의 의의 외적 확증으로 읽습니다 — 뿌리가 아니라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경험합니까?

창세기 17장은 순서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나는 엘 샤다이이니"), 그분의 명령("나 앞에서 행하며 완전하라"), 그리고 정체성과 방향의 갱신이 그것입니다. 오늘의 부르심도 같은 순서를 따릅니다. 하나님을 알며, 그분의 말씀으로 말함을 받고, 순종이 길을 드러내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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