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신뢰

순결한 신뢰: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고

믿음은 소리 내어 말하는 말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은밀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 앞에서 마음을 열어 드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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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ESV
사도행전 5:1-20

그러나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 아내 사빌라와 함께 재물을 팔아 그 값의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니 그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의 발 앞에 놓으니 베드로가 말하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거짓말하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남아 있을 때에 네 소유가 아니었느냐 팔린 후에도 네 권에 있지 아니하냐 네가 어찌하여 이 일을 마음에 품었느냐 네가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니라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숨이 거지니 듣는 자가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그의 시체를 싸서 메어다가 장사하니 약 세 시간 후에 그의 아내가 그 일의 어떤 줄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베드로가 그에게 말하되 너희가 그 땅을 이 값으로 팔았는지 내게 말하라 하니 대답하되 그러하다 이 값으로 팔았다 하니 베드로가 말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합의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한 자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너를 또한 메어내리라 하니 그 여자가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숨이 거늘 젊은 사람들이进来하여 그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자가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사도의 손으로 여러 표적과 기사가 백성 중에 행하여지니 다함이 솔로몬의 행각에 모이더라 그 나머지는 아무도 감히 그들과 합류하지 못하되 백성이 그들을 칭찬하더라 주 안에서 믿는 자가 더 많아지니 남녀의 무리가 더하더라 심지어 병든 사람을 거리에 메어나와 침상과 요 위에 눕히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이기를 바라더라 또 예루살렘 사면의 고을로부터 무리가 모여 병든 자와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자를 데리고 오매 다 나음을 얻으니 대제사장과 그 함께 있는 자들이 다 일어나니 이는 사두개인의 당파라 그들이 시기심을 일으켜 사도들에게 손을 대어 옥에 가두었더니 주의 천사가 밤에 옥문을 열어 데리고 나가서 말하되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니 그들이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 함께 있는 자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자손의 원로원 다를 모으고 옥으로 보내어 그들을 잡아오라 하니 종들이 가서 옥에 있는 그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서 고하되 우리가 보니 옥은 온전히 잠겨 있고 지킨 자들이 문에 서 있는데 문을 열고 보니 그 안에는 아무도 없더라 성전 직위장과 대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크게 난처하여 이 일이 어찌 될까 하더니 혹이 와서 고하되 보라 너희가 옥에 가둔 그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이다 이에 직위장이 종들과 함께 가서 잡아오되 백성에게 돌에 맞을까 두려워하여 힘으로 하지 아니하니라 그들을 데려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묻되 우리가 너희에게 이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히 명하였거늘 보라 너희가 예루살렘에 너희 가르침을 채우고 또 그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씌우고자 하느냐 하니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말하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그의 오른손으로 높여 주와 구주로 삼으사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 사함을 주게 하셨고 우리는 이 일의 증인이요 하나님이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그들이 듣고 마음에 찔러 즉시 그들을 죽이고자 하더니 공회 중에 가말리엘이라 하는 바리새인이니 율법교사로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가 일어나 명하여 그 사람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무엇을 하려는 자인지 스스로 삼가라 이전에 두다스가 일어나 스스로 자기를 뭇 사람이라 하니 약 사백 사람이 따랐으나 그가 죽임을 당하니 따라 하던 모든 사람이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인구를 호적할 때에 갈릴리의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미혹하게 하여 따르게 하였으나 그도 죽임을 당하니 따라 하던 모든 사람이 흩어졌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제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떠나라 이 뜻이나 이 일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헐어지고 사람에게서 나지 않았으면 너희가 능히 그것을 헐지 못할 것이니 혹 하나님을 거스리는 싸움이 될까 하노라 하니

사도행전 5:1-11에는 초대 교회의 엄숙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신자들이 재물을 자유로이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내려놓고 있을 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공모하여 값의 얼마를 떼어두면서도 모든 것을 드린 것처럼 가장하였다. 베드로의 꿰뚫는 질문, "어찌하여 네 마음에 사탄이 들어가 거룩한 영을 거짓말하게 하도록 하였느냐?"는 이 사건의 핵심을 드러낸다. 그들의 죄는 돈에 인색한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불성실에 있다. 이 본문은 이 경고와 함께 사도의 표적과 기적의 넘침을 병치하여, 은밀한 죄를 분별하시는 동일한 성령이 교회의 증거를 확증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믿음과 신뢰의 주제가 양쪽 절반을 관통한다. 참된 믿음은 외양의 가식극을 거부하며, 성령께서 주신 공동체는 주님 앞에서 투명하고 어린아이 같은 신뢰 안에서 번영한다.

Narration

역사적 및 문학적 맥락

사도행전 5:1–11은 사도행전 서두 장들에 위치하며, 흔히 '예루살렘 시대'라 불리는 시기에 해당합니다. 이 시기는 오순절 직후에 사도들이 신앙 공동체를 세워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앞 장은 바나바가 밭을 팔아 그 온 전액을 사도들의 발 앞에 내려놓은 것으로 끝나고(사도행전 4:36–37), 사도행전 5장은 의도적인 반대 사례라 할 수 있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역시 같은 시기 가시적인 관대함에 동참하여 소유물을 팔았으나, 그 대금의 일부를 슬쩍 취해둔 것입니다. 베드로의 엄한 책망은 그들의 행위가 얼마나重大的한 신학적인 위반인지 드러냅니다. 그 토지는 자기들이 가지고 있어도 되는 것이었고, 팔아서 받은 돈도 여전히 자기들이 처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외부적인 강제도 없었습니다. 문제는 선물의 크기가 아니라 성령께 거짓말한 데에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일화는 때때로 나답과 아비후의 심판(레위기 10:1–3)과 유형적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그들도 여호와 앞에 '不合한 불 fire'을 드렸다가 목숨을 잃었는데, 두 이야기 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가벼운, 주제넘은, 혹은 부정된 접근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을 경고합니다. 요세푸스는 같은 일반 시대를 기술하면서, 예루살렘 성전 구역에 솔로몬의 행각(요세푸스, 「고대사」 20.9.7; 「유대 전쟁사」 5.5.1)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바로 그 기둥 행각이 사도행전 5:12에서 사도들이 '한 마음으로' 모였던 장소입니다. 솔로몬의 행각은 이방인의 뜰 동쪽을 따라 놓인 덮인 회랑으로, 가르침과 기도를 위한 자연스러운 공공 모임 장소였습니다. 병자들을 거리로 데려와 베드로의 그늘이라도 그들 위에 비치게 하려고 모여든 무리는, 절기철 예루살렘의 분주한 순례자 분위기와 잘 들어맞습니다. 그 시기에는 '사방의 여러 성읍'에서 온 방문객들이 성전 구역으로 넘쳐흘렀습니다(절기 때의 군중 역학에 관해서는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6.5.3 참조). 문학적으로 이 장은 의도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즉, 엄숙한 심판(1–11절) 뒤에 성령의 능력이 임받아 행해진 이적과 표적, 그리고 성장이 따르고(12–16절), 이어서 첫 번째 사도들의 체포와 천사의 구출이 이어집니다(17–20절). 이 병치는牧회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교회는 죄를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는 경고를 받은 다음, 살아나신 그리스도가 여전히 천사의 중재를 통해 자기 백성을 지키고 계심을 격려받습니다. 그래서 '주의 천사'가 감옥 문을 열고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사도행전 5:19–20).

시공간 속의 배경

1세기 예루살렘의 초대교회 모임을 배경으로, 이 묵상은 박해와 성령의 divine 확인 가운데서의 사도적 신앙을 탐구한다.

신학적 의미

사도행전 5:1–11의 중심적인 신학적 주장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함과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베드로가外科의 정밀함으로 이를 명시한다. "네가 땅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것이 네 소유가 아니었느냐? 팔고 나서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지 아니하였느냐?" (사도행전 5:4). 따라서 죄는 충분히 드리지 못한 데 있지 않고, 은밀하게 취한 바를 마치 드린 양으로 가장한 데 있다. 세 가지 의미의 층위가 나타난다. 첫째, 거짓의 본질이다. "성령을 속이는"(3절) 것은 성령을 겉모습만 보고 속일 수 있는 평범한 인간 관찰자로 다루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 행위를 신학적으로 해석한다. "네가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한 것이니라"(4절). 믿음은 하나님이 보신다는 것과 그의 보시는 것이 선택적이거나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신뢰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자연스러운 응답은 투명함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는 외면적 믿음이 있었다 — 그들은 공동체에 참여하고 공개적으로 선물을 드렸다 —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자신이 수행하고 있는 하나님과 일치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사건은 돈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내주하시는 성령 앞에서의 내면적 삶의 진실성에 관한 것이다. 둘째, 참된 공동체의 성격이다. 본문은 "온 교회와 이 모든 일을 들은 자들 위에 큰 두려움이 임하니라"(11절)라고 말한다. 이 두려움은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는 공포가 아니라 정결케 하는 경외로운敬畏다. 초대 교회는 외양이 무한히 유지될 수 없는 공동체로 나타난다. 교회를 충만케 하시는 성령은 또한 교회를 살피신다. 믿음이 진실한 곳에서는 위선이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왜냐하면 증언에 능력을 주시는 동일한 성령이 또한 마음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레위기 10:3, "나의 앞에 나아오는 자들 가운데서 내가 영광을 받으리라"와 디모데후서 2:20–21을 비교하라. 거기서 무례한 그릇들이 자신을 정결케 하여 주인에게 유용한 그릇이 되도록 부름받는다. 셋째, 하나님의 행위의 양태이다: 심판과 은혜가 나란히 서 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쓰러졌지만, 사도들은 솔로몬의 행각에서 방해받지 않고 계속한다. 신자들은 "주를 더욱 믿고 따르는 자들이 더 많아지니"(14절), 병자들이 치유받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절들에서 주의 천사가 밤에 prison을 열어 사도들을 놓아준다 (사도행전 5:19). 궤사하는 자를 치시는 주께서 또한 신실한 자를 보호하신다. 그를 신뢰하는 것이 헛되지 않음을 보여주신다. 사도행전 5:14가 이를 표현하듯, "신자들이 주를 더욱 믿으니 남녀의 무리가 더 많아지더라" — 신적 엄격함과 신적 친절함이 함께 복음을 진전시키는 양태이다.

개인적 적용

2천 년 전에 남편과 아내가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그 본문이 어찌하여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가? 그 적용은 신학과 동일한 축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곧 성령 앞에서 정직한 마음이다. 1. 가시적인 믿음의 행위 안에서 여러분의 동기를 살피라. 아나니아와 사브나는 인색함 때문에 정죄받은 것이 아니라, 관대한 행위를 가면으로 사용했기에 정죄를 받았다. 우리가 공개적으로 기도하거나, donating하거나, 섬기거나, 믿음을 고백할 때, 영이 우리에게 묻는 질문은 그가 그들에게 물었던 베드로의 질문과 같다. '어찌하여 네 마음에 이런 일을 품었느냐?' 우리는 은밀한 망설임을 그것이 공연으로 굳어지기 전에 주님께 가져오도록 초대받는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의상(假面)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2. 재산, 시간, 명성을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신뢰함 때문에 느슨히 잡아라. 베드로는 분명히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 밭은 그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 돈은 주거나 주지 아니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일깨운다. 그리스도인의 관대함은 강제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다. 우리가 줄 때, 우리는 하나님에게 뇌물을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보유할 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빼앗는 것이 아니다. 보유할 자유 자체가 은혜다. 거짓말은 우리가 실제로 주지 않은 것에 대해 공로를 원할 때 시작된다. 이미지(映像)가 정교하게 편집되는 문화 안에서, 이 자유는 매일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써 실천된다. 내가 주는 까닭이 주는 이를 신뢰해서인가, 아니면 청중을 신뢰해서인가? 3. 교회의 징계를 친절로 받들라. '온 교회에 큰 두려움이 임했다'(11절). 성경은 이를 잔혹함으로 제시하지 않고, 보호하는 경외심으로 제시한다. 자기들 가운데 있는 기만을 거명하기를 거절하는 공동체는 그것의 쉬운 먹잇감이 된다. 은밀한 것을 사랑 안에서 거명하는 작고 온화한 정직은, 영의 정결하게 하시는 사역을 신뢰하는 행위 그 자체다. 4. 천사의 석방 안에서 안식하라. 본문은 부드러운 음으로 끝맺는다. 관헌이 사도들을 잡아 가두었을 때, '주의 천사가 옥문을 열고' 이르기를, '가서 이 생명의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말하라'(사도행전 5:19–20) 하였다. 정직한 자기 검열로 정결해진 믿음은 또한 신적 구원으로 지켜질 수 있다. 죄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 쇠사슬을 푸시는 분이다. 우리는 거룩함과 소망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둘은 함께 걸어간다.

되새김

이 엄격한 본문 안에도 기이한 온유함이 있습니다. 아나니아가 넘어지는 것을 보시는 주님은, 몇 절 뒤에 한밤중에 천사를 보내시어 "가서 성전에 서서 말하라"고 속삭이시는 바로 그 주님이십니다. 엄격함과 친절함은 그분 안에서 대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같은 아버지의 두 손입니다. 이것이 마침내 사도행전 5장에서 '신앙'이 의미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산헤드린 앞에서의 사도들의 담력도, 바나바의 관대함도, 심지어 지켜보는 교회의 회개한 두려움도 아니라 — 알려지는 것을 받아들일 willingness(의지)입니다. 은밀한 곳에서 보임을 받고도 움츠러들지 않는 것입니다. 온전한 배낭, 온전한 동기, 온전한 분裂된 마음을 가져와 내려놓는 것입니다. 방을 채우는 성령은 또한 양심을 채우십니다. 우리의 예배를 이끄시는 바로 그 임재는 우리의 가면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기이한 긍휼은 이것이 우리를 짓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지키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온 교회에 큰 두려움이 임했다" —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신자들은 주님께 더 많이 더해졌다." 정결함은 교회를 앗아가지 않습니다. 교회를 깊게 합니다. 가장 거룩한 땅은 종종 가장 사람이 많은 곳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 드러난 곳에서나 은밀한 곳에서나, 정직하게 — 신뢰받을 때, 숨길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고, 줄 것이 전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아나니아와 사빌라가 정말 죽어야 했나요? 그들의 죄가 그렇게 심각했나요?

성경은 그들이 드린 액수를 가지고 그들을 심판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령을 기만했다는 이유로 심판을 받았다. 재산과 돈은 그들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거짓은 다 드렸다고 가장한 데에 있었다. 성령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다. 교회가 형성되는 이 결정적 시기에 하나님은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처럼(레위기 10:1–3) 단합의 순수함을 보호하시기 위해 엄격한 심판을 사용하셨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팔아서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5:4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매매하지 아니한 때에는 네 소유가 아니었느냐? 매매한 후에도 네 처분에 있지 아니하였느냐?" 헌금은 자발적이어야 강제가 아니어야 합니다. 바나바는 자유롭게 팔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는 기만이었지, 적게 낸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은 정해진 액수가 아니라 마음의 정직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이토록 엄격하게 신자들을 심판하시겠습니까?

사도행전 5장은 초대 교회를 위한 독특한 형성적 심판입니다. 오늘날 동일한 심판을 기대해서는 안 되지만, 원칙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조롱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며, 성령은 신자 안에 거하시고, 위선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히브리서 12장은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책망하신다"라고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종종 성령의 부드러운 권면과 교회의 사랑하는 훈련을 통해 우리를 교정하십니다.

"성령을 속이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령을 속이는 것은 성령을 속일 수 있는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신으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외적인 영적 행실로 내면의動機를 가리려 할 때, 우리는 사실상 “내가 원하는 것만 God가 보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이 충만하게 계신 공동체에서 아나니아와 삽비가 한 일이었습니다.

왜 심판의 심판이 기적과 대규모 회개에 바로 선행하는가?

이것이 누가가 보여주는 신학적 리듬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긍휼이 함께 서 있다. 심판은 교회가 아무렇게나 모인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임을 드러냈고, 경외감이 사도들의 권위를 높였으며, 신자들은 '주를 더 따르는 자'가 되었다 (사도행전 5:11–14). 표적들은 사도적 권위를 확인시켜 주었고, 회심들은 성령의 역사를 증거했다. 참된 신앙은 진실을 갈망하는 이들을 끌어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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