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위로

고난 속의 회심: 떠나지 않는 그 눈을 봄

시라 17:1–20 — 생명이 짧고 괴로움이 무거운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며, 돌아와 위안을 받으라 부르시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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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ESV
집회서 17:1-20

주께서 땅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다시 그것으로 돌려보내셨으며 사람들에게는 짧은 날과 한정된 때를 주시고 땅 위의 만물에 대한 권위를 허락하셨고 그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사 자기와 같은 힘을 부여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 가운데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게 하시고 짐승과 새를 다스리는 권한을 주셨으며 그들에게 혀와 눈을 만드시고 귀와 사유하는 마음을 주셨고 그들을 지식과 깨달음으로 채우시며 선악을 알게 하셨고 그의 위엄의 작품들을 보여주기 위해 그들의 마음을 살피셨으며 그들이 그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여 그의 행하심의 위대함을 알리리라 그가 그들에게 지식을 주시고 생명의 법을 그들에게 부여하시며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고 그의 판단들을 그들에게 보여주셨으며 그들의 눈은 그의 영광스러운 위엄을 보았고 그들의 귀는 그의 음성의 영광을 들었으며 그들이여 모든 불의를 경계하라 하시며 각 사람에게 그의 이웃에 관한 계명을 주셨도다 그들의 길은 항상 그의 앞에 있으며 그의 눈에서 숨겨지지 않을 것이요 만민에 한 통치자를 세우셨으나 이스라엘은 주의 소유된 분깃이며 그들의 모든 행위는 그 앞에서 해 같고 그의 눈이 그들만이 길을 끊임없이 살피시며 그들의 죄악이 그에게 숨겨지지 않고 그들의 모든 죄가 주의 앞에 있도다 사람의 자선은 주 앞에서 인장과 같아 그가 사람의 친절을 눈동자 같이 지키시리라 후에 그가 일어나 그들에게 보응하시며 그들이 머리에 보응을 내리시리라 그러나 회개하는 자에게는 돌아올 것을 허락하시며 인내하기 어려워하는 자들을 격려하시도다 회개의 부르심 너희는 주께로 돌아가 너희 죄를 버리며 그의 앞에서 기도하여 너희 허물을 줄이며 지극히 높은 이에게 돌아가서 불의에서 떠나고 가증한 일을 심히 미워하라 음부에서 지극히 높은 이에게 누가 찬송하겠는가 살아 있어 감사드리는 자처럼 하겠는가 죽은 자에게서는 없는 자와 같이 감사가 그쳤으며 살아 잘 있는 자가 주를 찬송하도다 주의 긍휼이 얼마나 크며 그에게 돌아오는 자를 위한 그의 용서가 얼마나 크뇨 모든 것이 사람 안에 있을 수 없나니 사람의 아들은 불멸하지 아니함이라 해보다 무엇이 더 밝으랴 그러나 그 빛도 사라지는도다 그러므로 살과 피는 악을 꾀하니 일이오다 그가 하늘 높이 군대를 정렬하시나니 모든 사람은 티끌과 재뿐이라

시라서 17:1–20절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창조적 존엄, 모든 사람의 길을 살피시는 His 눈길, 그리고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이끄시는 부드러운 초대를 따라간다. 이 본문은 하나님이 보시고, 인자를 기억하시며, 회개하는 피곤한 자를 들어올리신다는 교리 안에서 고난과 위로의 주제를 견고히 세운다.

역사적 배경과 문학적 배경

Sirach(또는 전서, 벤 시라서라고도 함)는 예루살렘에서 약 기원전 180년경에 서기관이었던 여호수아 벤 시라에 의해 저술되었으며, 그의 손자는 후에 이 작품을 약 기원전 132년경에 그리스어로 번역하였다. 이 책은 유다가 쇠퇴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권력과 부상하는 셀레우코스 제국 사이에 끼여 있던 격변의 시기에 집필되었으며, 텍스트는 종종 부패한 지도자, 헬레니즘화, 전통적인 토라 경건의 상실에 대한 불안을 반영하고 있다. 10장은 오만, 통치, 그리고 현명한 치안관과 오만한 폭군 사이의 차이에 관한 더 큰 단위(약 9장부터 14장까지)에 속한다. 벤 시라의 신학은 언약 전통을 토대로 한다. 민족들은 여호와께서 제정하신 도덕적 질서에 따라興亡하며,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경외함'에 뿌리를 둔 '명예의 백성'으로 살아야 한다(시라서 10:19-20 참조). 헬레니즘 시대는 예루살렘으로 범람하는 그리스 교육과, 요세푸스가 기록한 바와 같이 대제사장들이 뇌물을 수수하고 성전 예배가 타락한 시기로 특징지어졌기 때문에, 불의한 통치자들과 '오만함'에 대한 벤 시라의 경고는 마치 자신의 세대에 대한 예언적 해설처럼 읽힌다.

시공간의 메아리: 성전에서 영혼의 심연까지

다윗 전승의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선지자들과 엑소더(유배) 시대에 설정된, 시락서는 이스라엘의 엑소도 후(post-exilic) 공동체의 언약 신학에 뿌리를 둔 지혜 문헌을 통해 고난을 성찰한다.

본문의 의미

Sirach 17:1–20은 고난과 위안에 대하여 함께 다루는 네 개의 흐름으로 전개된다. 첫째, 존엄을 지닌 창조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부터' 형상하시고, 힘과 형상, 다스림과 혀, 눈과 귀, 마음과 지식, 그리고 총명을 부여하셨다. 인간의 존엄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로가 근거하는 토대이다.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피조물로서의 가치를 잃는 것이 아니다. 그 창조자는 깨어진 자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둘째, 언약과 율법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사들을 왕관처럼 씌우신 후에 '그들에게 지식을 주시고, 생명의 율법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가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세우셨고, 그의 심판들을 그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Sir 17:11–12). '영원한 언약'(히브리어: בְּרִית עוֹלָם, 베리트 올람)은 환난과 위안이 모두 의미를 갖는 틀이다. 고난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관계적인 언약 안에서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의미와 마침을 갖는다. 셋째, 만물을 살피시는 눈이다.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보시고 그의 행위의 위엄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Sir 17:13). '그들의 길은 항상 그 앞에 있으며, 그의 눈에서 숨겨지지 않을 것입니다'(Sir 17:15). '그의 눈은 그들의 길을 continuously 살피십니다'(Sir 17:19). 이 반복은 의도적이다. 하나님의 시선은 무관심한 감시가 아니라 사랑하는 주의 깊은 관심이다. 죄를 살피시는 그 눈은 또한 회개하는 마음을 살피신다. 넷째, 실패하는 자를 향한 위로이다. '그가 사람의 인자를 자의 자의 눈동자 같이 지키실 것입니다. 그 후에 그가 일어나 보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에게는 돌아옴을 허락하시고, 인내가 실패하는 자들을 격려하십니다'(Sir 17:18, 22–24 LXX). 여기서 위로의 주제가 절정에 이른다. 하나님의 눈은 기록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자를 기억하시고, 피곤한 자를 들어주시며, 돌아오는 자를 환영하신다. 신학적의 논리가 분명하다. 창조주가 당신을 만드셨고, 언약의 지키시는 분이 당신을 붙드셨고, 살피시는 분이 결코 시선을 거두시지 않기 때문에, 그러므로 고난받는 자가 돌아설 수 있다. 그리고 위로로 맞을 수 있다.

오늘의 적용

이 고대 지혜가 현재 고난 중에 어떻게 위로가 되는가? 1. 수치가 당신의 가치를 잃었다고 말할 때, 당신의 존엄성을 기억하라. 당신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형상, 힘, 다스림으로 왕관처럼 꾸몄다. 고난은 당신의 가치에 대한 판결이 아니다. 창조주의 손이 그것이다. 2. 혼돈이 아무 의미 없다고 말할 때, 언약을 기억하라. 당신은 무작위 폭풍 속에 있지 않으며 '생명의 언약' 안에 있다. 하나님이 당신을 그의 목적 안에 '할당하셨다'. 통증에는 지평선이 있다. 왜냐하면 언약에는 자기 말씀을 지키시는 저자가 계시기 때문이다. 3. 외로움이 아무도 보지 못한다고 말할 때, 시선을 기억하라. '그의 눈이 그들의 길을 끊임없이 살피신다.' 당신의 회개를 위해 살피셨던 그 눈이 당신의 일어남을 위해 살피고 계신다. 당신은 고난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존재이다. 4. 인내가 실패할 때, 초대를 기억하라. '인내가 실패하는 자들을 그가 격려하신다.' 히브리어 어근 나하스(위로하다, 안식을 주다)는 피곤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받쳐준다. 당신은 힘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격려를 받기로 초대받는 존재이다. 5. 벌이 아닌 위로로서 회개를 실천하라. 시라치는 회개를 짓누르는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이 '돌아옴을 허락하시는' 길로 제시한다. 회개의 눈물은 신적 위로가 들어오는 현관이다. 돌아오는 영혼을 향해 그 문이 잠긴 적이 없다.

되새김

이삭서 17장에는 기묘하고 거룩한 역설이 있습니다. 죄를 지켜보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바로 그 동일한 하나님께서 '사람의 인자를 그의 눈동자같이 지키시며'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눈동자는 몸 가운데서 가장 예민하고 가장 보호받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부드럽게 보호하시는 것은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우리의 인자, 곧 모든 긍휼의 행위, 모든 조용한 자선, 상한 자를 위해 흘리는 모든 눈물입니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이것은 안식할 수 있는 부드러운 자리입니다. 결코 잠들지 않는 그 눈은 긍휼 없이 벌을 내리는 눈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부드러운 것을 소중히 간직하는 눈입니다. 앞날을 내다볼 수 없고, 고통이 세상을 캄캄하게 만들었을 때, 여러분의 인자가 우주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 보존되어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바늘의 눈을 만드신 분이 바로 여러분의 이름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리고 만일 여러분의 인내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면 — 벤 시라가 그렇게 솔직하게 이름하듯이 — 그러면 이 글 아래에 깔린 속삭임을 들으십시오. '인내가 무너지는 자를 위로하신다.' 70인역 헬라어에서 사용된 동사 'parakaleō'(파라칼레오)는 예수님이 성령, 곧 위로자를 가리키실 때 쓰신 바로 그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약속하신 신적인 위안은 감정이 아니라 한 인격, 곧 무너진 영혼을 만나 들어 올리는 격려이십니다. 돌이키라. 버리라. 기도하라. 돌아오라. 죄를 미워하되, 그분은 치유하시려고만 미워하신다는 것을 알라. 죽은 자들에게서는 감사함이 이미 그쳤습니다 — 그러나 여러분은 살아 있습니다. 여러분이 살아 있기에 찬송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눈물 속에서도 다시 한번 불러 보십시오.

자주 묻는 질문

시라서가 "죽은 자들에게서 감사함이 그쳤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이며, 이는 고통받는 자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라서가 시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오직 살아 있는 자만이 찬양할 수 있다는 점이며, 이것 자체가 위안이 됩니다. 당신이 숨 쉬고 있는 한, 돌아와 감사를 드릴 여지가 남아 있습니다. 삶의 사실 자체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예배의 터전입니다.

그의 눈동자처럼 지켜받는 위안은 얼마나 큰가!

눈동자는 몸의 가장 민감하고 보호받는 부분이다. 하나님이 이 이미지를 사용하신 것은 당신의 모든 친절과 회개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부드러운 곳에 보존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죄를 보시는 것이 그분이 선을 보시는 것과 모순이 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시라서는 하나님의 눈이 모든 것을 보시지만, 회개한 자에게는 돌아올 길을 허락하시며 죄에는 그 응당한 벌을 주신다고 보여줍니다. 같은 바라보시는 분이 다른 마음에는 다르게 응답하십니다 — 이것은 한 시선 안에 공의와 긍휼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고통받는 중에 어떻게 실질적으로 주님께 "돌아갈" 수 있는가?

시라서는 구체적인 단계들을 제시합니다: 죄행을 그치고, 그의 임전에서 기도하며, 허물을 줄이며, 가증한 일을 미워하라. 돌아가는 것은 추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일련의 구체적인 자기 부인의 행위들입니다 — 각각이 신적 위로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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