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신뢰

�에서 하늘까지: 바울이 신뢰한 음성

빛이 하늘에서 내리쬐었을 때, 사울의 믿음은 그가 신뢰하기로 선택한 그 음성으로부터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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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본ESV
사도행전 22:1-20

형제들이며 아버지들아, 이제 내가 너희 앞에서 하는 변명하는 말을 들으라. 그가 히브리 말로 그들에게 말하는 것을 듣더니 더욱 조용하거늘, 이르되, 나는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난 유대인이요, 이 성에서 다말리엘의 발 아래서 우리 조상의 법의 엄격한 교훈을 따라 교육되어, 오늘날 너희 모두와 같이 하나님께 열심을 가진 자라. 내가 이 도를 죽일 때까지 핍박하여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라. 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원회가 내 증인이 되나니, 그들에게서 형제들에게 가는 편지를 받아서, 다메섹에 있는 자들도 사슬에 묶어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을 받게 하려고 가더라. 내가 여행하며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러, 정오쯤에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추더라. 내가 땅에 엎드려, 이르는 소리를 들으니,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내가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를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라 하시더라. 나와 함께 있던 자들이 빛은 보았으되, 내게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은 듣지 못하더라. 내가 가로되, 주여, 무엇을 하오리이까? 주께서 내게 이르시되, 일어나 다메섹으로 가라, 네게 정하여진 모든 일을 거기서 알려주리라 하시더라. 그 빛의 영광으로 인하여 보지 못하므로, 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손으로 끌고 다메섹에 들어갔더라. 율법대로 경건하며, 거기 사는 모든 유대인에게 칭찬 듣는 하나냐라가 내게 와서 곁에 서서 이르되, 형제 사울아, 다시 보라 하거늘, 바로 그 시각에 내가 그를 우러러 보았더라. 그가 이르되,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네게 그 뜻을 알게 하시며, 의로우신 이를 보게 하시며, 그 입의 음성을 듣게 하시도록 정하셨느니라. 너는 본 것과 들은 것을 모든 사람에게 그의 증인이 될 것이라. 그러므로 왜 머뭇거느냐? 일어나 세례를 받고, 그 이름을 부르며 네 죄를 씻어 버리라 하더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황홀한 가운데 빠져, 그가 내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는데, 이르시되, 속히 이르러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그들이 너로 말미암아 나에 대한 증언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시거늘, 내가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믿는 자를 각 회당에서 가두고 매꼬던 것을,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때에 곁에 서서 동의하고, 그 죽이는 자들의 옷을 지킨 것을 그들이 다 아나이다. 나를 가라사대, 떠나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 보내리라 하시더라. 그들이 이 말까지 듣고 소리를 높여 이르되, 이런 놈은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니, 살려 두는 것이 옳지 않다 하더라. 그들이 소리 지르며, 옷을 벗어 던지고, 허공에 먼지를 날리니, 천부장이 그를 영문 안으로 끌고 들어가게 명하며, 그들이 왜 저렇게 소리 지르는지 알기 위하여 채찍으로 형문하라고 하더라. 그들이 가죽 띠로 그를 묶을 때에, 바울이 곁에 선 백부장에게 이르되, 너희가 로마 사람이며, 정죄도 안 된 자를 매로 치는 것이 합법하냐 하더라. 백부장이 이를 듣고 천부장에게 가서 알리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하려고 하느냐? 이 사람이 로마 사람이니라. 천부장이 와서 이르되, 나에게 말하라, 너는 로마 사람이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다. 천부장이 대답하되, 나는 큰 돈으로 이 시민권을 얻었노라. 바울이 가로되, 나는 나면서부터 로마 사람이니라 하더라. 그를 형문하려는 자들이 즉시 떠나가고, 천부장도 그가 로마 사람인 줄 알고, 그를 결박하였으므로 두려워하더라. 이튿날,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바울을 고발하는지 확실히 알고자 하여, 그를 놓고, 대제사장들과 공회를 다 모으게 명하고, 바울을 끌고 내려가 그들 앞에 세웠더라.

사도행전 22장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 앞에서 바울이 변호한 내용을 기록합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자기 의로 자기를 의롭게 하려는 노력이 살아계신 그리스도와 부딪히며, 사명이 그분을 신뢰하는 것으로 바뀌었던 그 순간—을 되짚습니다.

Narration

예루살렘의 계단 위에서

바울은 로마 군영의 계단 위에 서 있고, 성전 군중이 아래에서 몰려온다. 그가 이 도시를 다윗의 길 박해자로 마지막으로 걸었던 때로부터 25년이 지났다. 그가 히브리어로 말하자 — 그 언어 자체가 폭동을 무장해제시키는데, 듣는 자들이 갑자기 자기들 중 하나임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것은 신학이 아니라 간증이다. 그는 자신의 자격을 열거한다: 다소, 가말리엘, 엄격한 율법, 그들의 것과 대등한 열정. 그런 다음 그는 그 중단을 말한다 — 정오보다 밝은 빛, 그의 이름을 불러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물으신 음성. 요세푸스는 이 시기의 총독들(펠릭스, 페스투스)이 네로의 임명으로 유대를 통치했다고 기록하며, 로마 시민이 폭력으로부터 보호되는 것은 로마 부관 대장의 일상적 관행이었다 — 이것이 바로 바울이 발언할 수 있는 이유이다(참조: 사도행전 21:30-36; 23:10). 누가가 "율법에 따라 경건한 사람으로 다마스쿠스에 사는 모든 유대인의 증언을 받는" 사람이라고 묘사한 아나니야는 인간적 다리가 된다: 이전 박해자 위에 손을 얹고 일어서서 세례를 받으라고 말하는 신실한 유대인. 지리학은 간결하지만 의미심장하다 — 다소에서 예루살렘으로, 다마스쿠스로,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길 — 그리고 시대는 바울 선교 시기, 갓 태어난 에클레시아의 신앙이 박해의 불 가운데 단련되고 있던 때이다.

시공간: 한낮의 다메섹 길

바울의 선교 여행은 예루살렘에서 이방 민족들의 중심지까지 �어 나가, 증언과 화해 안에서信仰과 신뢰가 다져지는 곳까지 이른다.

의미: 믿음은 빛 이후에 듣는 것이다

이 본문에서 믿음과 신뢰는 먼저 사울이 받아들이는 교리가 아니라 그가 순종하는 음성이 된다. 그는 논쟁하지 않는다. 그는 묻는다. “주여, 누구시옵니까?” 헬라어 호 퀴리오스는 누가의 서사 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주됨에 대한 최초의 고백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이 순간까지는 하나님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남자의 입술에서 나온다. 그 구조를 주목하라: (1) 빛이 압도하고, (2) 음성이 그의 이름을 두 번 부른다 ― “사울아, 사울아” ― 이는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께서 마르다를 부르시고 20장에서 마리아를 부르시는 것을 상기시키며, (3) “다마스쿠스로 들어가라”는 명령은 자기 주도성을 내려놓으라는 부르심이며, (4) 아나니아의 도착이 음성이 시작한 일을 완성한다 ― 한 사람이 그에게 빛의 의미를 일러준다. 그러므로 여기서 믿음은盲目한 도약이 아니라 고지된 수용이다. 사울은 “네게 정하신 일을 다 알게 되리라”(10절)고 들으며, 바로 “그 순간에”(13절) 시력을 회복한다. 신뢰는 빛이 시력을 가져갔을 때 손을 끌려 가는 기꺼이함이며, 조상의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말씀하셨기에 아나니아라는 이름 모르는 낯선 이를 순종하는 것이다. 이 본문 전체가 구원하는 믿음을 ― 학위, 열정, 이력을 가진 사람이 ― 자신의 이력을 중단시키는 분과 정렬되는 것으로 정의한다.

적용: 당신의 다메섹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미 믿고 있고 계속 믿으려 애쓰는 사람들을 위해 이 본문에서 세 가지 실천이 나옵니다. 첫째, 자신의 자격을 정직하게 말하십시오. 바울은 다소나 가말리엘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 그들이 서 있게 두었다가 그리스도가 그들을 무효화하시게 합니다. 당신의 이력, 교리 체계, 열정이 당신의 정체성이라면, 그것이 아니라고 가장하지 마십시오. 단지 그것을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질문 옆에 놓으십시오. 둘째, 중단을 예상하십시오. 믿음은 중단이 없는 것이 아니라 후에 손을 잡혀 이끌려 가는意愿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 일부는 아직 길 위에 있으며,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바로 그 밝음에 눈이 멀어 있습니다. 그래도 일어나십시오. 아나니아라는 이름의 사람 — 상담자, 충실한 친구, 아직 읽지 않은 구절 — 이 이미 오고 있습니다. 셋째, 다음 구체적인 단계에 순종하십시오. '어찌하여 지체하느냐? 일어나 세례를 받아 너의 죄를 씻으라' (16절). 믿음은 드문 감정이 아니라 다음 순종입니다. 지체하는 것은 신뢰의 정반대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 기다림의 시간은 끝났습니다.

되새김

나는 이 전체 변호 가운데서 가장 마음을 어지럽히는 구절은 무리가 바울이 끝까지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바로 그 구절, 곧 '그의 이름을 불러 네 죄를 씻으라'라는 말임을 발견한다. 이십오 년 뒤 병영의 계단에 서 있는 바울은 여전히 그 문장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의 손은 쇠사슬에 묶여 있고, 그의 원수들은 소리를 지르고 있으며, 그는 여전히 자신의 죄가 씻긴 사람이다. 이것이 신뢰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 안전도, 박수도, 고요한 삶도 아니라, 한 번 더 말할 기회를 받았을 때 자신이 당한 일을 말할 수 있을 뿐인 증인이. 사울을 이름으로 부른 그 음성이 지금 당신을 당신의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당신이 지금 걸어가고 있는 어느 한낮이든. 문제는 그 빛이 충분히 밝으냐가 아니다. 문제는 형제나 자매의 손이 당신을 다음 방으로 이끌어 들어가도록 당신이 허락하겠느냐, 그리고 한번 시력을 회복하게 되면 당신이 남은 생애를 당신이 들은 것에 대해 증언하며 보내겠느냐이다.

자주 묻는 질문

다메섹의 빛이 참말이었다면, 바울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왜 그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까?

누가는 같은 세부 사항을 두 번(행 9:7; 22:9) 약간 다른 표현으로 기록한다. 그들은 소리를 들었지만 분명한 음성은 듣지 못했고, 또는 빛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 사건은 실제로 일어났지만 인간의 지각은 선택적이다. 바로 그 빛이 사울에게는 심판이었으나同伴者들에게는 놀라움에 불과했다.하나님이 사울에게만 들리게 하셨기 때문에 사울 홀로 응답할 수 있었다.

아나니아가 왜 교회의 알려진 박해자를 방문하려고 했을까?

아나니아 자신이 설명한다. 주께서 환상 가운데 그를 지도하시며 사울이 '택한 그릇'이라고 말씀하셨다 (사도행전 9:15). 안나니아가 그를 '형제 사울'이라 부른 것은 그가 이미 그 회개를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믿음은 순종이다 — 상식적으로 여전히 두려워해야 할 사람을 향한 순종이다.

신앙은 빛 속의 음성을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까, 아니면 세례에서 시작됩니까?

이 본문에서 신앙은 말씀을 듣고 예수를 '주님'이라 부르는 것('주님, 누구시옵니까?')에서 시작되지만, 그 표현과 공적 확인은 곧 세례—'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신앙이 뿌리이고 세례는 응답이다; 이 둘은 분리될 수 없으며, 사울이 세례를 받기 전에 먼저 믿었던 것처럼 한데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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