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위로

애통의 노래가 불 앞에 짝 놓입니다 고통에 재빠른 위안이 없을 때에

예레미야 21장 — 칼과 전염병과 기근의 그늘 아래서, 고난받는 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이 여전히 다스리신다는 말을 들을 수 있으리요?

BibleVibe Editorial읽기 5분
번역본:ESV
예레미야 21:1-14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말씀이라 시드기야 왕이 말기야의 아들 바스뢴과 마세야의 아들 스바냐 사제를 그에게 보내며 말하되 “바벨론 왕 느부사드네살이 우리를 치고 있으니 여호와께 우리를 위하여 구원하옵소서 혹시 여호와께서 그 모든 기사와 같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사 그로 우리를 떠나게 하시리라” 하였더라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너희는 시드기야에게 이같이 말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바벨론 왕과 사방에서 너희를 에운 갈대아인을 치며 성 밖에서 싸우는 너희 손의 병기를 내가 다 뒤집어 이 성 가운데로 들여오게 하리라 내가 또 친히 내 손을 펴서 강한 팔과 분과 노와 큰 진노로 너희를 칠 것이며 이 성의 거민 사람과 짐승을 치리니 그들이 큰 pestilence으로 죽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후에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신하들과 이 백성 곧 이 성에서 pestilence과 칼과 기근을 면한 자를 바벨론 왕 느부사드네살의 손과 그 원수의 손과 자기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넘기리니 그가 칼로 너희를 치되 아끼는 자가 없으며 긍휼을 베풀 자가 없으며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또 이 백성에게 이같이 말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노니 이 성에 남아 있는 자는 칼과 기근과 pestilence으로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운 갈대아인에게 나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되 자기 생명을 얻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내 얼굴을 이 성을 향하여 악을 행하려 함이요 선을 행하려 함이 아니라 하였나니 이 성이 바벨론 왕의 손에 넘기워 그로 불사르리라 유다 왕의 집에 대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다윗의 집이여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아침마다 공의를 재판하며掠奪당하는 자를掠奪하는 자의 손에서 건져주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으로 인하여 내 분이 불 같이 발하여 꺼지지 아니하리라 이 골짜기의 거민이여 평지의 반석이여 여호와의 말씀에 나를 칠 자 누구이며 나를 들어 우리 처소에 들어올 자 누구라 하거니와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의 행위대로 내가 너희를 벌하리라 내가 그 삼림에 불을 놓으리니 그 사면의 모든 것을 사르리라

예레미야 21:1–14은 바빌로니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둘러쌌을 때,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보낸 마지막 필사의 간청을 기록하고 있다. 그 대답은 시드기야가 바라던 위로가 아니다. 하나님은 친히 그 성읍을 치겠다고 선언하시며, 전염병이 내릴 것이고 갈대아인들에게 항복하는 것이 생명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8절은 그 선택을 엄격히 제시한다.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노라.' 그리고 다윗의 집을 향하여, 하나님은 왕에게 '아침마다 정당한 판결을 내리며' '약탈자에게 빼앗긴 자를 그 손에서 건져라'고 명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진노가 불같이 타오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본문은 인간의 지름길이 없는 고통의 한 차원—신적 징벌 아래 놓인 성읍의 고통, 그리고 하늘이 우리를 대적하시는 듯할 때 참된 위치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을 엄숙히 드러내는 창이다.

Narration

역사적 배경

예레미야 21장은 유다 왕국의 마지막 고통스러운 해에 위치합니다. 연대는 대략 기원전 589년입니다. 9개월 전, 기원전 589년에 선지자 에스겔이 첫 번째 유배자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그 낯선 땅에서 그는 고국의 느린 붕괴를 지켜보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젋은 시드기야 왕—갈게미스 전투 이후 파라오의 정책 변화로 인해 꼭두각시로 세워진—은 이제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발견합니다. 그는 다윗적 모범을 따르는 왕도 아니며,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왕도 아닙니다. 그의 이름 자체가 '여호와는 나의 의로움'을 의미하지만, 그의 통치는 흔들리는 신의로움, 이집트와의 비밀 외교, 그리고 불쾌한 진리를 말하는 선지자들을 박해하는 궁정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요세푸스는 그의 유대고대사(10.7-10.8)에서 이 시대의 대략적인 윤곽을 확인합니다: 느부갓네살 왕(히브리어: 느부갓레살) 아래 바벨론인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시드기야는 선지자들에게 문의했습니다—단지 그가 바라던 길한 신탁이 아니라 경고를 받았습니다. 요세푸스는 도시가 기원전 586년에 긴 포위 끝에 함락되었고, 성전과 왕궁이 불탔음을 기록합니다. 요세푸스는 또한 시드기야의 눈이 리블라에서 그의 아들들이 학살되는 것을 목격한 후 뽑혔음을 기록합니다—이 이미지는 다가오는 학살에 대한 예레미야 21장의 항의와 왕 자신의 운명을 읽을 때 더욱 소름끼치는 울림을 얻습니다. 1절에서 예레미야에게 오는 사절단은 주목할 만합니다: 말기야의 아들 바스훠(책의 앞부분에서 예레미야를 때렸던 바로 그 바스훠가 아닙니다)와 제사장 마아세야의 아들 스바냐. 왕의 사절과 제사장 대표의 결합은 이것이 사적인 문의가 아니라 공식적인 국가의 청원임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죄를 고백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과거를 뒤지고 있으며, 이전 기적의 재연을 희망합니다: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전 모든 기적대로 행하시어 우리에게서 물러나시기를'(예레미야 21:2). 그들은 반복을 원합니다. 그들은 향수를 원합니다. 그들은 히스기야를 산헤립의 손에서 건져낸 하나님(열왕기하 19장 참조)이 느부갓네살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대답은 그들이 구하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반복하시지 않을 것입니다—그가 더 약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백성이 그에게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기적'들은 회개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회개 없이는, 동일한 신적 능력이 이제 심판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과 위로의 주제가 들려야 할 맥락입니다: 고난은 현실이고, 위험은 치명적이며, 오는 위로는 도피의 위상이 아니라 명료성의 위상입니다.

시공간 속에서 순간을 찾다

다윗 시대의 예루살렘에서 바벨론 위기 속에 후기 제1성전 시대를 배경으로, 포위와 추방과 고난을 통해 유다의 언약 신의가 시험받던 때를 무대로 한다.

본문의 신학적 의미

예레미야 21장은 표면적으로는 단일한 심판의 예언이다. 한 번 읽으면 위로가 어디에 있는지—고난과 위로라는 주제가 어디서 발판을 찾는지가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이 파고들면 이 본문은 도피의 위상이 아니라 진리의 위상인, 복합적인 위로의 신학을 드러낸다. 첫째, 본문은 고난을 신적 징벌(치징)으로 명명한다. 6–7절에 언급된 칼과 전염병과 기근은 우연한 재앙이 아니다. 그것들은 언약적 결과이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이 바로 지금 그 백성을 징벌하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은 편안하지 않지만 의미 있다. 언약 안에서의 고난은 하나님의 부재의 증거가 아니라 그의 현존의 증거이다. 주님은 성읍에서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그 성읍 안에서 그 성읍을 치고 계신다. 그분은 심판 중에도 자기 백성을 포기하시기를 거부하시기 때문이다. 이것 자체가 한 형태의 위로이다. 하나님이 징벌하실 때 그분은 잊으신 것이 아니다. 둘째, 본문은 심판 안에 기이한 긍휼을 제공한다. 8절은 선포한다.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을 두노라." '길'(דֶּרֶך�ְ, derek)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형이상학적 추상이 아니라 사람이 걸어가는 통로를 함축한다. 하나님은 결과가 필연적이지 않게 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전히 길이 있다. 9절은 그 길을 명시한다. "너희를 포위하고 있는 갈대아인에게로 나아가는 자는 살겠고 자기의 목숨을 건지리라." 여기서 긍휼은 충격적이다.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인 동일한 군대가 항복하는 자들에게 뜻밖에도 생명의 통로가 된다. 위로는 구원이 아니라 값비싼 순종을 통한 생명의 보존이다. 셋째, 본문은身体的 고난과 도덕적 형성을 구별한다. 11–14절의 마지막 예언은 "유다 왕의 집"과 "다윗의 집"에 addressed 된다. 하나님은 명하신다. "아침마다 정당하게 판결하며, 빼앗긴 자를 약탈자의 손에서 건져라." 이것은 날마다의 의에 대한 부르심이다. 히브리어 어근 מִשְׁפָּט(mishpat, '판결')은 구약에서 가장 윤리적 무게가 큰 단어들 중 하나이다. 정의는 평화가 돌아오면 한 번 부여하는 사치가 아니라 언약 공동체의 날마다의 산소이다. 여기서 주어진 위로는 고난의 부재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고난—의를 행하는 작고 날마다의 고난—으로의 초대이다. 넷째, 본문은 위로를 시련의 제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성품 안에 위치시킨다. "내가 이 성읍을 대로 악을 향하여 세웠나니 좋음을 향하여 세운 것이 아니라" (렘 21:10). 5절에서 "내가 권세의 편 팔로 너를 치고 스스로 너와 싸우리라"고 말씀하시는 동일한 하나님이 그 얼굴을 정하셨다—그분의 목적이 확고하다. 이 하나님 안에는 흔들림이 없다. 그분은 주변 민족들의 변덕적인 신이 아니다. 그분의 심판은 자의적이지 않다. 역설적으로 위로는 이러하다—그분의 얼굴이 한 성읍을 거슬러 정해졌을 때조차 그것은 정해져 있다. 그분은 혼란스러운 하나님도 아니며 통제를 잃으신 하나님도 아니다. 갈대아인들이 그분의 목적 밖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며 선지자는 즉흥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난은 신적 문법이 있으며, 오늘날 우리가 그 문장의 모든 단어를 읽을 수 없더라도 그러하다. 기독교 독자에게 이 본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성취하고 재구성하는 그림자를 형성한다. 느부갓네살 아래 예루살렘의 고난은 그 성읍이 받을 만한 언약적 심판을 자기 몸으로 담당하신 의로운 분의 더 큰 고난의 선조이다. 예레미야 21장이 살 유일한 길은 갈대아인들에게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선포하는 곳에서, 복음은 살 유일한 길은 진영 밖으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선포한다(히 13:13). 예레미야 21장의 위로는 정직하다; 복음의 위로는 영광스럽다. 그러나 양쪽 다 자기 세운 요새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위로가 없다고 주장한다.

오늘의 성경봉독자 신청서

우리 대부분은 문자 그대로의 포위 상황에 직면하지 않으며, 우리를 추방하려는 제국과 협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희망의 배신이라는 고통의 질감은 낯설지 않다. 우리는 구원받기를 하나님께 간청한다. 우리는 가장 경건한 기억들을 모아 말한다. "주님, 우리 가족, 우리 교회, 우리 민족을 위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소서. 분명히 다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은 때로 침묵한다. 예레미야 21장은 바로 그 순간에 대해 말한다. 이 장은 우리의 삶에 고통과 위로의 주제를 적용하는 데 세 가지 교훈을 가르친다. 첫째, 과거 기적에 대한 향수를 경계하라. 2절의 사절단은 과거를 현재에 대항하는 무기로 사용했다. 그들은 오늘 회개할 의지가 없었기에 하나님이 어제를 반복하시기를 원했다. 이 적용은 날카롭다. 현재의 순종을 피하기 위해 과거의 구원을 끌어올릴 때, 우리는 신앙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감상적인 마법을 행사하는 것이다. 고통 속의 위로는 기적을 반복하기 멈추고 마음을 살피기 시작할 때 찾아온다. 둘째, 때로는 생명의 길이 우리의 요새에서 걸어 나오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법을 배우라. 예레미야 21:9의 놀라운 위로는 항복이 생명이었다는 것이다. 항복은 거의 결코 세상, 우리의 문화, 우리의 본능, 우리 이야기의 영웅들이 우리에게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약성서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며, 우리의 권리를 내려놓으라고 부를 때 이것을 메아리친다. 이것을 적용한다는 것은 어떤 고통의 계절에든 이렇게 묻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방어하고 있는 요새는 무엇인가? 나의 생명을 실제로 보존할 항복을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신가? 셋째, 아침마다 정당한 판결을 내리라. 이것은 일상 생활에서 의로움의 길고 화려하지 않은 작업이다. 이것은 위로처럼 보이지 않는 위로이다. 이것은 다음 단계의 축복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지는 위로이다. 이 본문은 고통의 돌파가 하나님이 우주를 고치시기만을 기다림으로써만 뒤집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평범한 자리에서의 정의의 느리고 매일의 작업을 통해서도 뒤집힌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과부. 직원. 이웃. 나그네. 아침의 판결. 구원받은 압박 받는 자. 이것들이 어떤 시대에서든 위상의 씨앗이며, 이것들이야말로 영구한 구원이 자랄 수 있는 유일한 토양이다. 그리고 오늘 만약 포위당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면, 기도가 올라가 보낸 그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것에서 용기를 얻으라. 검과 역병을 명하신 하나님은, 때의 충만함에 다른 성 밖의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몸으로 검과 역병을 담당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다. 그는 심판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그는 그 심판에서 살아서 나오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궁극적으로 위상은 포위의 부재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당신과 함께 걸으시고, 적절한 때에 당신을 이끌어 내시는 분의 임재이다.

되새김

예레미야 21장이 존중하는 특별한 고난이 있다. 기도했는데 기도한 대로 응답받지 못한 사람들의 고난이다. 많은 묵상집이 고난을 벼리, 스승, 문이라고 말한다. 예레미야 21장은 더 정직하다. 고난을 벽이라 부른다. 장애물이 통과해야 할 시험이 아니라 인정해야 할 장벽인 때가 있다. 벽은 실재한다. 하나님은 실재하신다. 침묵은 실재한다. 그리고 질문은 '벽을 어떻게 무너뜨릴 것인가'가 아니라 '벽 안의 문이 어디에 있는가'이다. 문은, 예레미야가 우리에게 말하듯, 항복의 방향에 있다. 그것은 자연적 마음이 원하는 답이 아니다. 자연적 마음은 벽이 바깥으로 무너지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그 문을 주시되 그것을 지나가라고 하신다. 그것은 모든 것을 값으로 요구한다. 성을 값으로 요구하시고, 왕을 값으로 요구하시고, 성전의 불가침성을 값으로 요구하신다. 그러나 그것은 생명을 준다. 이 본문은 위로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바로잡도록 초대한다. 위로는 포위공격의 부재가 아니다. 위로는 얼굴이 굳건하시고, 눈이 떠 계시며, 말씀께서 진실되신 하나님의 임재이다. 고난의 긴 밤에 가장 위안이 되는 것은 밤의 제거가 아니라, 그 밤 안에 함께 깨어 계신 분이 있다는 발견이다. 도시를 잃어버리지 않으신 분, 우리와 함께 싸우시기까지 하시는 분,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파괴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와 싸우시는 분이 있다는 발견이다. 이것이 예레미야 21장의 독특한 위로이며, 어떤 번영 복음도 줄 수 없는 위로다. 이는 언약의 자녀로 대우받는 위보다. 진실을 들려받는 위보다. 제국의 시대를 넘어서는 유일한 노동인 정의의 날 노동에 초대받는 위보다. 예루살렘의 무기들을 그들 자신에게로 돌리신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세력들의 무기들을 자기 아들에게로 돌리신 바로 그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리고 십자가의 기묘한 산법으로 참된 생명을 주는 유일한 문을 여셨다는 것을 아는 위보다.

자주 묻는 질문

예레미야 21장에는 어찌하여 심판의 말씀만 있고 위로의 말씀이 없습니까?

예레미야 21장의 맥락에서, 가장 깊은 위안은 거짓된 평화가 아니라 분명한 말씀이다. 고난의 큰 고통 중 하나는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시다고 믿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그분의 눈, 그분의 뜻, 그분의 부르심이 드러난다. 그 말씀이 심판일지라도, 하나님이 여전히 말씀하시고 여전히 다스리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고난 속에 있는 참된 위안이다.

바빌로니아에 항복하는 것이 어떻게 '생명을 얻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는가?

이것은 본문에서 가장 인상적인 역설 중 하나이다. 예레미야 21:9는 직관에 반하는 길이다—구원은 성벽을 지키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세우신 상황을 인정하는 데 있다. 나가는 것은 신적 징계를 받아들이고 통제에 대한 환상을 내려놓는 행위이다; 안에 머무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다. 신약에서 동일한 논리가 히브리서 13:3에 반영되어 있다—그 장막 밖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이 참된 생명의 길이다.

매일 아침 정당한 판결을 내린다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의는 한 번의 결정이 아니라 매일의 실천임을 뜻합니다. 매일 아침 우리는 새롭게 직면합니다. 오늘 나는 가족과 동료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오늘 내가 쥔 권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내가 외면하는 동안 누군欺 사기를 당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매일의 작은 결단이 우리의 영혼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함께 형성합니다. 지속되는 평안은 이 매일의 훈련에서 자라납니다.

만일 내가 기도했는데 차대히 바랐던 의답을 받지 못하였다면, 예레미야서 21장은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예레미야 21장은 값싼 위안을 제공하지 않지만, 두 가지를 정직하게 직면하도록 초대합니다. 당신의 기도가 어쩌면 현재의 순종을 피하기 위해 과거의 기적을 불러오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당신이 지키고 있는 그 '성벽'이 사실 직면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피하기 위해 쌓은 요새가 아닌지? 하나님의 얼굴이 당신을 '대적하여' 세워진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여전히 얼굴입니다. 하나님은 돌아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스스로 쌓은 요새에서 걸어 나오도록 초대하십니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성벽 안이 아니라 밖—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HomeDiscoverBibleStudy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