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위로

무거운 것들 아래: 고통이 초대가 될 때

고난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다듬으시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걸어가도록 보내시는 용광로입니다.

BibleVibe Editorial읽기 5분
번역본:ESV
지혜서 3:1-10

평화를 위한 간청 이에 그들이 사절을 보내어 평화를 구하며 말하기를 “보라, 위대한 왕 느부카드네살의 종들인 우리가 당신 앞에 엎드렸나이다. 우리를 당신 뜻대로 하소서. 보라, 우리의 건물들과 우리 모든 땅, 그리고 모든 밀밭과 양과 소 떼, 그리고 우리 모든 양 우리와 그 천막들이 당신 앞에 있나이다. 원하는 대로 하소서. 우리 성읍들과 그 주민들도 당신의 종들이니 오셔서 당신이 좋게 여기는 대로 그들을 처분하소서.” 하였더라 이 사람들이 홀로페르네에게 이르러 이 모든 일을 알렸더라. 그러자 그는 그의 군대와 함께 해안으로 내려가 산꼭대기 성읍들에 수비대를 주둔시키고 그들 중에서 선발한 자들을 그의 동맹으로 삼았더라. 그리고 이 백성과 그 사방 백성들이 화환과 춤과 탬버린으로 그를 환영하더라. 그가 그들의 모든 성소를 헐고 그들의 거룩한 숲들을 베었으니, 이는 그 땅의 모든 신들을 멸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니, 이는 모든 민족들이 오직 느부카드네살만을 예배하고, 그들의 모든 언어와 부족들이 그를 신으로 부르게 하려 함이라. 그런 후에 그가 닷단에 가까운 에스드라엘론의 가장자리, 유다의 큰 산맥을 향한 곳에 이르러, 여기에서 게바와 스기토polis 사이에 진을 치고, 그의 군대를 위한 모든 보급품을 모으기 위해 한 달 동안 머물렀더라.

할당된 본문(지혜서 3:1–10)은 제공된 참고 자료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 묵상은 홀로페르네스 앞에서 나라들이 굴복하는 내용을 묘사하는 유디트서(Jdt 3:1–10)의 본문을 근거로 합니다. 고난과 위로라는 주제가 전개되는 곳에서, 필자는 고난받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아우르는 더 넓은 정경적 맥락에서 그 주제를 다루되, 본문을 넘어선 직접적인 인용문을 만들어 내지는 않았습니다.

Narration

배경: 무릎 꿇은 세계

이 본문은 우리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그늘 안에 세워놓는다. 해안 평야를 지나 이스르엘 골짜기까지 이어지는 도시들은 하나씩, 짓누르는 단 하나의 선택지에 직면한다. 굴복하느냐, 아니면 부서지느냐. 이 본문은 절제된 표현이 인상적이다— "우리를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는 한 발의 화살도 날아가지 않기 전에 이미 마음속으로 항복한 도시들의 외침이다. 목자들, 밀밭들, 양떼들, 장막들, 아이들—모든 것이 정복자의 발아래에 내어놓인다. 사람들의 자기 신들의 신전조차도 무너뜨려진다. 왜냐하면 승리자는 조공만이 아니라 예배까지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6세기 BC의 고대 근동 세계로, 제국이 레반트 땅을 느린 조수처럼 누비고 지나던 시대이다. 지정학적 풍경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리아-팔레스타인을 거쳐 이집트로 이어지는 교역로, 즉 후에 포로의 소식과 마침내 귀환의 소식을 운반하게 될 그 길을 중심으로 한다. 홀로페르네스가 "게바와 스기톨리스 사이"에 진을 치는 에스드라엘론 평야는 이 땅의 위대한 교차로이다. 그것을 점령하는 자가 유다의 산간 지역과 해안으로 향하는 길의 관문을 쥐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원래 청자들에게 이 상황은 단순히 역사적인 것이 아니라—거울이었다. 많은 이들이 외국 권력의 발아래에 살았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신전이 모독당하는 것, 자신의 존엄성이 벗겨지는 것을 목격했다. 본문은 고난을 미화하지 않는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명명하고, 이어지는 장들에서 하나님이 외국 도시에 있는 한 과부를 일으키시어 뜻밖의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 위안은 압력의 부재에서 오지 않는다—그 안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서 온다.

게바와 스시톨리스 사이

두 언약 사이 시기(배경은 대략 기원전 8~7세기, 작성은 기원전 2세기)를 배경으로 한 이 이야기는 메소포타미아(니느웨)의 앗수르 포로기와 에크바타나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가로질러 펼쳐진다.

이 본문이 고통과 위로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

세 가지 신학적 흐름이 이 본문을 관통하여 고난과 위로에 관한 성경 전체의 가르침으로 이어진다. 첫째, 고난은 숨겨지지 않고 드러난다. 본문은 항복에서 눈을 돌리지 않는다. 한때 자신만의 이름과 성벽과 신들을 가졌던 도시들은 단 하나의 반복되는 문구로 축소된다. "우리에게 무엇이든 당신 뜻대로 하소서." 이것은 자기 결정력을 빼앗긴 자들의 언어이다. 성경은 고통에 대한 이러한 솔직함을 존중한다. 그것은 아직 가지지 못한 용기를 연극하라고 고난받는 자들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설령 그 항복이 잘못된 주님께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항복의 언어 속에서 그들을 만난다. 둘째, 위로는 제국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이다. 바라보는 제국은 실재하고, 압도적이며, 영구해 보인다. 느부갓네살의 요구는 전적이였다. 공물과 영토와 예배. 그럼에도 성경의 더 큰 이야기는 어떤 제국도 궁극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세상의 끝처럼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는 종종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구원의 사전 준비이다. 유딧기서에서 그 구원은 제국이 한 번도 세어보지 않은 한 여인을 통해 온다. 그러므로 위로는 단단한 침대 위에 놓인 부드러운 베개가 아니라, 마지막 장이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는 조용한 확신이다. 셋째, 고난은 하나님의 백성을 정련한다. 더 넓은 지혜 전통(그리고 이 책의 deutero-canonical 전통을 공유하는 솔로몬의 지혜서)은 환난을 거짓된 것을 태우고 참된 것을 남겨두는 용광로로 규정한다. 이 본문에서 항복하는 도시들은 그들의 사당과 존엄을 잃는다. 이어지는 장들에서 이야기가 전해지는 충실한 백성은 그들의 안전을 잃지만 그들의 영혼을 지킨다. 성경의 위로는 결코 감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변화되어 가면서 붙들림을 받는 위안이다.

오늘 삶으로 실천하기

이 고대 장면을 오늘의 위로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1. 무거운 것을 이름 붙이라. 첫 번째 단계는 가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 붙이는 것이다. 압박이 진단에서 오든, 직장 상실에서 오든, 관계의 붕괴에서 오든, 혹은 느린 문화적 무게에서 오든,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압도당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할 권한을 허락한다. 정직은 위로가 들어오는 문이다. 2. 항복이라는 거짓 약속에 저항하라. 이 본문의 성들은 항복의 겉보기 평화(外見上の平和)를 택했다. 때로 세상은 같은 거래를 제안한다. 신념을 버리고, 신앙을 누그러뜨리고, 순응하면 고통이 멈출 것이라고. 이 이야기는 그 거래가 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비용으로 든다고 경고한다. 진정한 위로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포기하도록 요구하지 않는다. 3. 자신의 삶에서 '온전한 한 달'을 찾으라. 홀로페르네스는 한 달간에 머물렀다. 우리들 중 많은 사람이 지금 바로 '온전한 한 달' 속에 살고 있다. 길고 평범한 기다림의 시간. 그런 계절의 위로는 갑작스러운 구원이 아니라 꾸준한 임재이다. 즉 그밥을 구하라: 문자를 보내는 친구, 붙잡는 성경 말씀, 돌아오는 숨결. 하나님은 긴 중간의 시간을 전문으로 하신다. 4. 위로를 받는 자일 뿐만 아니라 위로하는 자가 되라. 유딧기서는 위로를 받은 후 자신의 백성에게 위로의 대행자가 되는 여자를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 위로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우리는 그 위로의 통로이다. 기다림의 한 달 동안 우리를 안정시키는 같은 긍휼이 누군가의 기다림의 한 달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다.

되새김

긴 달의 주님, 당신은 우리보다 기다림의 무게를 더 잘 아십니다. 당신은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골짜기를 걸어 지나셨으며, 그 건너편에 머물러 있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게 당신께 정직한 말을 가져가도록 가르쳐 주옵소서—항복처럼 들리는 기도, 문장이 없는 눈물, 속삭임일 뿐인 믿음을요. 우리의 긴 달 한가운데에서 우리를 만나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곁을 걸어가는 자들의 발에 등이 되는 자를 만드옵소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겪으시고 지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이의 이름으로. 아멘.

자주 묻는 질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분이라면, 왜 이런 큰 고난을 허락하시겠습니까?

성경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습니다. 고통의 이유에는 여러 층위가 있습니다—죄, 타락한 세계, 타인의 악한 선택, 그리고 신앙의 형성적 사역이 그것입니다. 위로가 오는 곳은 고통의 부재가 아니라 그 안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입니다. 시편 34:18은 주님이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고 말씀하시며, 고린도후서 1:3–4는 그분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 부르시며, 우리의 고난을 사용하시어 우리를 다른 사람에게 위로의 통로로 삼으십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오랜 기다림의 시기 동안 하나님의 위안을 경험할 수 있는가?

본문에서 '온달(whole month)'은 우리가 기다림이 종종 느리고 평범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러한 시기에 하나님의 위로가 항상 극적이지는 않습니다. 그 위로란 기도와 말씀, 성도의 교제, 그리고 성령님의 조용한 임재를 통해 옵니다. 시편 46:10은 "이르되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라"고 말씀합니다. 참된 위로란 환경이 변하지 않더라도 변하지 않는 깊고 깊은 평강입니다.

우리의 고난이 어떻게 다른 이들을 위로하는 데 우리를 준비시키는가?

고린도후서 1:4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고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써 또한 어떤 고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나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신 그 위로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상처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는 다리가 됩니다. 우리는 한 번도 젖어본 적 없는 손수건을 우는 사람에게 건네줄 수 없습니다. 고난이 하나님께 맡겨질 때, 그것은 고난당하는 자들과 함께 걸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자격—자비로운 자격—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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